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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최면역사의 주요인물 5인 -필로

조회 수 8068 추천 수 0 2006.08.28 15:42:50
최면의 역사 속에는 주요한 인물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현대최면과 관련하여 주요한 인물 5명을 설정하여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요인물의 설정은 그 기준에 따라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설정된 인물들만 중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겠습니다.

다만, 현대최면의 내용과 기법들과 연관하여 좀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여기기에 이렇게 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안톤 메스머(Friedrich Anton Mesmer: 1734.5.23~1815.3.5)

* 독일의 의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의학

*주요저서 ; 《동물 자기론》(1755)

*주요작품  논문 <인체에 미치는 천체의 영향에 관하여>(1766)

: 1766년 <인체에 미치는 천체의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빈대학을 졸업하고, 그 곳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1774년 빈을 방문한 영국 천문학자 막시밀리안 헬이 위경련을 자석으로 치료한 것에 흥미를 느껴, 1775년 《동물 자기론(磁氣論)》을 발표하여 메스머리즘(최면술)을 실시하였다.

이 치료방법의 핵심은 동물자기라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의학회(醫學會)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일반인으로부터는 찬동을 얻어 주목을 끌었다. 1778년 파리로 갈 때, 학회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아래의 설명은, 메스머리즘에 대해 다른 여러 곳에서 설명되어지는 그런 일반적인 시각이 아니라 본래의 마법적,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메스머리즘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견해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 치유”란 최면술의 전신인 메스머리즘을 말한다. 다만 최면의 경우 언어 유도를 중시하는데 비해서 “자기 치유”의 경우 동물의 몸 주위에는 생체 자기장이 있어서 이를 통해 치유가 가능하다는 이론이었다.

현재의 외기발방기공과 유사하다고 여기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이 치유기법에서 언어유도에 의한 변성의식만을 따로 떼어내어 의학적인 치료기법으로 바꾼 것이 최면이다.

  서양의 대부분의 학문이 마법 등의 신비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연금술에서 화학이 나오고, 점성학에서 천문학이 나오고, 수비학에서 수학이 나오고, 마법에서 심리학이 나온 것 등이 그것이다.

그렇듯이 최면의 배후에는 마법이 자리를 한다. 최면의 기원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메스머 박사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메스머리즘이라 불리우는 기법이 최면의 기원이 되지만 사실 메스머리즘은 마법을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메스머리즘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공치료와 많이 흡사하다. 메스머리즘의 다른 이름이 “동물자기설”이다. 모든 동물들에게는 자기장과 같은 힘의 장이 있고 이를 강화하면 다른 이들의 자기장에 영향을 주어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치 기를 생체 에너지라고 하는 것과 흡사한 용어사용법이다.

메스머리즘은 마법, 특히 치유마법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온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근대의 과학자들과 의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후에 환자가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변성의식 상태에 들어가는 것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또한 이러한 변성의식으로의 유도는 동물자기 등의 불확실한 어떤 기운의 작용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유도 된다고 여겨 졌고 이렇게 해서 언어에 의해서 유도하여 변성의식으로 이끄는 기술로 대두 된 것이 최면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 여겨 졌기에 기존 의학권 안에 들어 갔고 후에 프로이트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의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확립에 큰 공헌을 했다. 요약하자면, 치유마법에서 마나를 이끄는 과정을 하지 않고 오직 언어로만 상대방의 의식을 다른 상태로 유도하는 것이 최면이라 여기면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므로 과학과 영합한 마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과학의 범위로 들어가므로 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존재한다. 먼저 얻은 것은 과학의 기술이므로 누구든지 재질과 무관하게 기술을 습득하면 행할 수 있고 특별한 자기 수련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잃은 것은 초기 메스머라이저(메스머리즘을 행하는 최면가)들이 행한 기적에 가까운 치유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몇몇 치유 사례는 거의 그리스도의 수준에 필적했다 한다.)

메스머리즘의 기원을 중심으로 살펴본 최면의 배경은 대강 이와 같다.
그러므로 최면치료와 기치료를 병행하면 메스머리즘이 된다. 현재의 기공이나 단학이나 선도 단체 중에 많은 수가 최면술에서 많은 기술들을 흡수하여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메스머라이저에 비하면 그 수준은 정말로 보잘 것 없다 할 수 있다. 메스머라이저들 중에는 단지 눈빛만으로 폭력배들을 찰나에 변성의식으로 이끌어 그들의 폭력성을 제거해서 평범한 시민으로 변화시킬 정도의 수준에 이른 이들도 많았었다 한다.

최면은 기술이므로 습득하면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다. 언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정신박약이나 정신질환자나 노인이나 아기 빼고는 모두 다 최면 유도로 변성의식(최면상태)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최면을 자주 행하면 목소리에 자력(메스머라이저 특유의 동물자기장)이 어리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에 마나가 실리는 언령마법의 기틀이 된다.





2.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5.6~1939.9.23)

*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의 창시자.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심리학  *출생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현재 체코) 프라이베르크

*주요저서  《꿈의 해석》(1900)

: 모라비아(현재 체코) 프라이베르크 출생. 빈대학 의학부 졸업 후 얼마 동안 뇌의 해부학적 연구, 코카인의 마취작용 연구 등에 종사하였다. 1885년 파리의 사르베토리에르 정신병원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환자를 관찰하였고, 1889년 여름에는 낭시(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 18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고, 18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900년 이후 그는 꿈 ·착각·해학과 같은 정상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고, 또 1905년에는 소아성욕론(小兒性慾論)을 수립하였다. 그의 학설은 처음에는 무시되었으나, 1902년경부터 점차 공명하는 사람들(슈테켈, 아들러, 융, 브로일러)이 나타났으며, 1908년에는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어 잡지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연구연보》(1908∼1914) 《국제정신분석학잡지》 등이 간행되었다.

또 1909년 클라크대학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강연한 일은 정신분석을 미국에 보급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변적 경향을 강화하여 이드(id) ·자아 ·상위자아(上位自我)와 같은 생각과, 생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설을 내세웠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스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하고, 이듬해 암으로 죽었다.

20세기의 사상가로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으며,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교육학 ·범죄학 ·문예비평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는 《히스테리의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1904) 《성(性)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논문》(1905) 《토템과 터부》(1913) 《정신분석입문》(1917) 《쾌감원칙의 피안(彼岸)》(1920) 《자아와 이드》(1923) 등이 있다.

최면의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래와 같은 사항들이 언급될 수 있다.
우선 프로이드 자신이 최면에 능숙하지 못했다 한다. 그는 10명중 1명 꼴로 최면유도에 성공을 했는데, 이와 같은 몇 가지 이유로 브로이어와 함께 이전 최면의 직접적 암시가 아닌 새로운 최면분석(Hypnoanalysis)를 최초로 성립했다. 그가 성립한 자유연상법(free association)은 사실상의 얕은최면상태에서의 최면분석이라 지칭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부흥으로 최면은 비주류 치료기법으로 전락했다.

말년(1900년 경)에 다시 최면에 관심을 가졌으나(1919년의 논문 'Turnings in the ways of analysis') 당시 이미 정신분석학이 대세였으므로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



3. 융(Carl Gustav Jung: 1875.7.26~1961.6.6)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국적 ; 스위스 .활동분야 ;심리학 , 출생지 ; 스위스 바젤

: 바젤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후 1900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 밑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1904년경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붙였다.

이어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런 업적들에 의해 그는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수제자로 인정되었다.

1908년 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이라 일컬음)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의 심리학은 신비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데다 난해하였기 때문에, 심리학 일반에 대해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나 성격을 ‘내향형(內向型)’과 ‘외향형(外向型)’으로 나눈 것은 그의 큰 공적이다.  

최면과 융은 그렇게 크게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다. 융도 한 때는 유능한 최면치료사였으나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최면이 갖고 있던 한계, 그 중에서도 특히 최면상태에서 내담자가 최면사의 암시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유사기억을 만들어 냄으로써 기억 내용 자체를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최면을 그만두었다고 함(Rossi & Cheek, 1994).

또한 1902년 파리 살페트리에 병원에서 자네(Janet)에게 최면을 배워서 사용했었는데, 자신이 최면으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질병의 원인에 관계없이 증상치료에 최면이 좋은 결과를 나타내자 환자들이 융을 마법사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최면은 단지 암시의 의해 유도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 대한 회의를 품었으며, 환자는 최면의 암시만으로 치료가 가능한 반면, 어떻게 치료되는지를 몰라 최면에 만족하지 못하여 최면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융의 경우는 오히려 어떤 직접적인 관련보다는 그가 세운 분석심리학과 그 안의 여러 인간의식에 대한 모델들이 최면분석과 최면치유에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하겠다. 국내에서 이부영씨가 펴낸 분석심리학 3부작('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은 그런 의미에서 최면치유와 관련하여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융의 혁신적인 통찰들은 정말로 훌륭한 것으로 심리학의 “제 3세력” 운동을 사전에 보여 줬다.  여러 면에서, 융은 ‘인본주의적, 개인초월 심리학(humanistic and transpersonal psychology)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다.

  "융은 프로이트(Freud)의 “개인 무의식”과 함께, 모든 인간들에 의해 공유되는 “집단 무의식”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개인 무의식이 콤플렉스(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조직되는 반면에, 집단 무의식은 꿈과 신화에서 추적해낼 수 있는 “원형들”과 “행동과 지각의 본능적인 패턴들”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

융에게서 영향 받은 죠셉 캠밸(Joseph Campbell)은 모든 문화의 신화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을 밝혀냈다. 융은 일반적으로 성적 욕망들을 덜 강조했다. 무의식은 “개별화”과정 전체와 초월적 힘을 통한 정신의 반대의 힘 사이의 균형을 향한 욕망으로 작동 된다고 생각했다.

인본주의적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융은 무의식이 단지 병리적인(pathological) 힘이라기 보다 오히려 건강과 생명력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융은 또한 무의식은 선뿐만 아니라 악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융에게서, 정신 구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힘에 의해 조직된다. 그는 자아나 무의식같이 프로이트(Freud)가 사용한 용어 중 같은 것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융의 전체 이론에 비추어 생각할 때 그것들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융에게 정신의 주요한 구조는 페르조나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자아를 포함한다.

페르조나는 사람이 세상에 내놓는 ‘가면’이다. 반면에 그림자는 사람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자기의 부분들이다. 남성에게는, 아니마(Anima)가 정신의 여성적 측면을 나타낸다. 반면에 여성에게는 아니무스(Animus)가 남성적 측면을 나타낸다.

융에게는 인격의 원형적 조직의 통합체는 자기(self)라 불린다. 개성화 과정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전체의 통일성이다.

(출처-사카모토 미메이의 『내 생에 처음 만나는 칼.G.융』 (현실과 미래 1999년))

"무의식은 의식이 폐기해버린 것들을 담은 쓰레기통이 아니라 의식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모태이다. 그래서 무의식은 의식이 외부 세계에 적응하느라고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버린 것들을 의식에 전해주며 정신적인 균형을 잡아주고 정신의 전체성을 이루게 한다. 무의식의 활동은 의식의 작용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무시당하고 사라질 때마다 무의식에서는 그것을 보상하려는 작용이 생겨난다."



4. 밀턴 H. 에릭슨(Milton Hyland Erickson: 1901~1980)

  Milton Hyland Erickson(1901-1980)은 현대 심리치료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덜 알려진 것은 심리치료에 대한 정형화된 이론적 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그의 제자들은 현재 그가 살았던 Arizona주의 Phoenix에 Milton Erickson 연구 재단을 만들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41년에 헐(Hull)의 제자였던 에릭슨(정신과 의사)은 환자로 하여금 어릴 때의 결정적 시기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급성 히스테리성 우울증을 최면으로만 치료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루어진 그의 활동은 치료상화에서의 최면의 유용성을 보다 높여 나갔다.

그는 갈등해결을 위한 환자의 내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무의식적 마음을 유도하는 수단을 고안하는 데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손가락과 같은 신체기관의 움직임을 통하여 무의식적 세계를 찾아 들어가고, 치료를 촉진하는 관념운동반응의 원리나 기법을 발달시켰으며, 대부분의 그의 업적은 최면을 통하여 간접적 암시를 줌으로써 가능하였다.

그의 최면은 일명 간접최면법(indirective hypnosis), 또는 간접적 최면치료법(indirect hypnotic therapy: Sharp, 1980)으로도 알려지면서 직접적이며 지시적인 전통적 최면과는 대조적인 최면의 한 분야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특히 심리치료 분야에서는 역설적 치료(paradoxical therapy)로도 유명한데, 인간중심 치료를 창시한 로저스(Carl R. Rogers)와 비교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Gunnison, 1985 ; Loprez, 1987). 그의 접근은 주로 제자인 헤일리(Jay Heley)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Palo Alto) 지역의 정신건강연구소(Mental Research Institute)에서 활동한 팔로 알토 그룹(Palo Alto Group : Gregory Bateson, John Weakland, Paul Watzlawick), 의사소통 이론을 중심으로 한 가족치료, 전략적 치료(stratege therapy)와 해결중심(solution orientation)치로 분야에 계승되었다.

특히 해결중심치료는 기존의 최면이 문제의 근원을 따지고 '왜' 문제나 증상이 생겼는지를 밝히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에 비해, 내담자가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어떻게' 변화를 이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더욱 관심을 갖고 치료를 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에릭슨의 이론은 구니슨(Gunnison 1985, 1990)과 오타니(Otani, 1989)등이 일반상다과 심리치료의 원리와 기법으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이론은 밴들러와 그라인더의 신경언어 프로그래밍 즉 NLP 체계의 기초가 되기도 하여 NLP가 성립하고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이 NLP에 의하여 최면은 더욱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에릭슨은 1959년에 미국임상최면학회(American Society for Clinical Hypnosis)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사후에는 그를 기념하는 재단(The Milton H. Erickson Foundation)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출처: '최면과 최면치료', 설기문, 학지사)

  
5. 데이브 엘먼(Dave Elamn: 1900~1967)

1964년에는 엘먼(Dave Elamn: 1900~1967)이 저서인 '최면: Hypnotherapy)'에서 역행요법(regression therapy)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최면의 유용성을 밝혔다.

그는 여덟살이란 어린 나이에 최면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최면이 치료적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십대의 시기 동안에 최면으로 연극을 하거나 쇼를 하기도 함으로써 일찍부터 자질을 인정받았다.

1923년부터 약 5년 동안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했으며 그것이 기반이 되어 1948년에는 처음으로 공개방송 현장에서 최면쇼를 선보였다. 이일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최면을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대최면가로도 유명해졌다.

그는 비록 학문적인 배경은 없으나 타고난 최면 능력으로 인해 많은 의료인을 비롯한 치료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최면이 일반의료와 치과적 치료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 기간 동안에 엘먼이 적극적으로 가르친 최면 기법은 오늘날도 대단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그는 환자로 하여금 재빨리 증상의 원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행시키는 방법인 '금속유도법(rapid induction methods)'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49세의 나이에 많은 의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데이브 엘먼 임상최면강좌(Dave Elman Course in Clinical Hypnosis)'를 개설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현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최면전문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출처: '최면과 최면치료', 설기문, 학지사)

(아래는, 엘먼의 현대최면을 직계로 이어받은 최면가인 제럴드 카인(Gerald Kein)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자는 ‘강민철’님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번역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엘먼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최면가’로서의 업을 늘 사랑했던 사람인데 반해, 대략 1985년 이전까지 그에게 최면교육을 받은 의사들이 아닌 일반 최면가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 면에서, 기존 최면가들에게 엘먼의 존재를 알리고 그가 구축해놓은 엄청난 지식체계를 전파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본 전기傳記문은 엘먼의 생애와 업적을 기술한 것으로, 최면계에서 또 한 명의 위인인 마틴 시걸이 정리하여 작성한 것이다. 마틴이1989년에 임종을 맞이하며 그의 서재 전체를 나(역주: 제럴드 카인)에게 남겼는데, 본 전기문이 바로 그 선물 중 하나이다.

본 전기문에는 데이브 엘먼에 대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사항들이 담겨 있는데, 마틴이 본 전기문을 작성하기 전에 엘먼의 부인인 폴린 엘먼을 만나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모쪼록 본 전기문을 통해 데이브 엘먼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정립되길 바라는 바이다.

모든 분들께 애정어린 경의를 표하며, 제럴드 카인

(전기문 본문)

약 25년전, 마틴 시걸이 AAEH(Association to Advance Ethical Hypnosis; 윤리적 최면 선도 협회) 뉴저지 제 1지부의 회장으로 있을 때, 방대한 청중들을 사로잡을만한 프로그램에 대해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것은 마틴이 데이브 엘먼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자에게 엘먼을 소개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회원들 마틴을 멍청이로 여기거나 심지어 정신이 나갔다고까지 생각했으며, 마틴의 시도는 쓸데없는 짓이며 시간낭비라고 하고, 엘먼은 전문가 그룹만 상대하는 사람이며 비전문가 그룹은 절대 상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은 마틴은 엘먼에게 편지를 썼고 며칠 후 엘먼의 전화를 받고 초청에 응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물론 당시 회원들에게 보낸 메일의 상당수가 반송되고, 펜실베니아를 비롯한 여타 지부의 배당금마저 끊기긴 했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마틴과 엘먼과의 친분이 무르익었을 때, 마틴은 엘먼에게 ‘비전문가 그룹’에 대해서도 상대해주기를 요청하자, 엘먼은 마틴에게 그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터놓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로 마틴과 엘먼은 서로의 자택에서 자주 만나며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고 하고, 이에 대한 기억을 마틴은 무척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이따금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에 대해선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결코 그만둘 줄 몰랐다고 한다.

마틴이 엘먼의 임종을 보던 날, 마틴은 무척 슬펐지만 엘먼은 자신의 임종 순간에서도 오래된 농담을 하며 웃음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엘먼의 장례식 날, 마틴과 그의 아내 도로시만이 그곳에서 유일하게 가족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최면계에서는 데이브 엘먼에 대해 ‘최면’이라는 특정 측면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최면 외에 여타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어서 이를 알려주고자 한다.

(그리고 아래는, 제럴드 카인에게 엘먼의 현대최면과 그 비전들을 전수해준 마틴 시걸의 글입니다).

데이브 엘먼은 1900년 5월 6일 Park River에서 태어났고, 1967년 12월 5일에 North Dakota에서 생을 마감했다. 최면에 대한 엘먼의 관심은 어릴적부터 형성되었는데, 이는 노련한 최면가였던 그의 아버지 덕분이라고 한다. 엘먼이 8살 되던 해부터, 그는 고통/통증을 덜어주는데 있어서 최면의 엄청난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실 때 어느 친지분이 최면으로, 좀처럼 다루기 힘든 고통을 아주 빠르게 완화시켜주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그 친지분은 제법 유명한 최면가로서 뛰어난 위업을 이루며 선망의 대상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하는데, 아무튼 어린 엘먼은 그의 아버지가 전통적인 의료 절차 없이도 고통으로부터 여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지 못했다고 한다.

10대 시절 엘먼은 방학기간 동안 코미디언으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는데, 한때 최면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사귀는 여자친구들의 부모님의 반대로 곧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실은 그가 행사하는 힘에 대해 그들이 두려움을 느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데이브 엘먼은 연예계에서 각광받는 노련한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됐는데, 그는 특히 색소폰과 바이올린에 아주 능했으며, 게다가 모든 곡을 직접 쓰고 노래 부르는 ‘singer-songwriter’로서 한때 뉴욕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한동안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별로 즐기지 못했던 엘먼은 그 일을 그만두고 음반출판업에 몸담게 되었고, 이때 제법 유명했던 W.C. 핸디와 친분을 쌓고 몇 년간 그와 함께 일하며 꽤 많은 곡들을 썼다고 한다.

몇 년 후 엘먼은 그 일도 그만두게 되는데, 핸디는 여전히 함께 작곡한 곡들에 대한 로열티 지불을 위해 엘먼에게 계약서를 보냈다고 하고, 그동안 W.C.와 핸디의 가족들과 아주 친해진 엘먼은 그 관계 속에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미래의 폴린 엘먼이라고 한다.

1923년에서 1928년까지, 엘먼은 라디오 일을 무척 하고 싶어했는데, 낮에는 생계형 일을 하고,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밤에는 여러 라디오국에서 무급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8에 드디어 WHN 라디오국에서 유급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곧이어 CBS(콜럼비아 방송국)에 채용되어 뉴욕일대 주요 도시에 있는 메이저급 라디오국에서 일하며 ‘아이디어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엘먼은 작가로, 프로듀서로, 연출가로 활약하며 자신만의 쇼를 진행하기도 했고, 라디오국에서 여러 유명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때 잭 버니 쇼 제작진들의 휴가 기간 동안 그들을 대신하여 캘리포니아에서 Hobby Lobby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Kate Smith 쇼에서 수차례 작가로 일하기도 했고, 대부분의 메이저급 광고 에이전시와도 일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자선공연을 하곤 했는데, 엘먼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종종 그의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선공연을 추진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48년에 이르러, 어느 마을에서 자선공연을 준비하던 엘먼은, 공연을 며칠 앞둔 시점에 원래 멤버들이 공연시간에 맞춰서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전갈을 받고는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다른 멤버들을 불러모으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몇시간 동안 혼자서 좌중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심한 끝에 문득 (수년간 전혀 해본 적 없던) 최면쇼가 떠올라 결국 그것을 하게 되었고, 결국 그 최면쇼를 성공적으로 치른 후로 엘먼의 최면기법을 가르쳐달라는 의사들과 접촉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의사들은 이전에 다른 최면 코스를 밟긴 했으나 시도해보는 족족 모두 실패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엘먼은 내과의사 20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대상으로 교육을 맡기로 하고 코스를 진행했는데, 코스를 끝낸 다음에 또 다른 20명의 의사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코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는 점점 더 규모를 더해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엘먼은 다소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라디오 방송국 일을 사랑하면서도 최면을 가르치는 일도 하고 싶은 상황에서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엘먼이 택한 일은 최면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라디오국 일은 그의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로 엘먼은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서 내과의사와 치과의사들만을 상대로 최면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각지에서 의사들로부터 자기네 지역에도 와서 가르침을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고, 데이브 엘먼의 최면 교육 열풍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엘먼의 교육 과정을 테잎에 담고 서적까지 출간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유명한 “Findings in Hypnosis."가 바로 그 책이다. (데이브 엘먼의 사후엔 그의 아내 폴린 엘먼이 그 책 관련 일을 맡아 한동안 운영하다가 내쉬출판사(Nash Publishers)에 그 일을 넘겼는데, 그 때 책 이름이 "Explorations in Hypnosis"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로스엔젤레스 웨스트우드출판사에서 "Hypnotherapy"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고 있다.)

의사들은 데이브 엘먼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엔 내내 그 책을 참고하며 최면작업을 했고, 최면에 대한 도움말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의사들의 전화가 빗발쳤으며, 이는 곧 엘먼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최면 교육 과정을 이수했으나 사실상 충분히 배우지는 못했는데, 이는 ‘비전문가(비의료인)’는 의사들에게 무엇이 됐든 가르칠 수도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최면은 의사들만의 독점적 분야여야 한다고 여기는 의사들의 배타성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엘먼은 그런 분별없는 의사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래도 어쨌거나 엘먼은 계속해서 그들을 가르쳤고 계속해서 그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엘먼이 사적으로 작성해놓은 어느 노트에는 마틴에 대해 그가 느낀 점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마틴이 의사가 아니라서 특별히 마틴에게 래포를 느꼈다고 한다. 아무튼 마틴으로선 엘먼의 가르침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by Martin M. Se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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