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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 질의 깨달음 이야기...

조회 수 2922 추천 수 0 2013.05.08 08:49:51

나는 1960년 영국 남동부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나는 열정적이고 호기심이 많아 모험과 미스터리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취미로 골동품 찾기에 몰두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시골지역을 오랫동안 찾아 다녔다. 이른 나이에 탐구가 시작된 것이다!

 

성장할수록 차분하지 못한 내 성격 탓에 어떤 특정 영역에 집중할 수가 없어 직업을 고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일찍 학교를 떠나 요리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자 하였으나, 결국엔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일을 무척 즐겼다. 그것은 내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많이 빼앗아 갔으며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주문을 받아서 일을 해나갔으므로, 생각이 지어낸 이야기 속을 방황하는데 푹 빠져있을 여유가 있었다.

 

육체와 우주의 미스터리에 대한 끝없는 관심이 있어 다양한 식이요법들과 약초 치료법들을 실험했고, 별을 관찰하고, 마법 버섯들을 먹고, 웨이트 트레이닝과 바디 빌딩으로 육체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20대 초반에 이르러 부득이 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깨 부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 없게 되었고, 22살에 아내가 우리의 첫째 딸을 낳자 나는 건설업에서 원예업으로 직업을 바꿨다. 몇 년 간 나는 켄트의 과수원에서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과일을 따고 나머지 기간에는 정원을 가꾸었다. 이 기간 동안 내 생각들은 영적이고 비의적인 문제들로 돌아섰다.

 

1985년쯤, 나는 공제 조합에 가입하고 매달 정기적으로 신비주의와 ‘우주 법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나는 매주마다 실험을 하고 연구 논문을 읽는 것을 즐겼다.

 

2, 3년 후 나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강의에서 제공된 작고한 인도 스승의 가르침과 구루-제자 관계 맺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그 구루들은 이미 죽었지만! 나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구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강박관념이었다.

 

다시 2, 3년을 지내면서 몇몇 영적 기법들을 익히자, 나는 점점 그것에 지루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서양인 구루가 쓴 책을 발견하였다. 그 책은 내게 이미 깨달아 있으며 해탈은 전혀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진실은 명백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후(다음 몇 년 사이 그리고 상당수의 책에서) 자신을 세계의 스승이라고 선언하고는 관심 있는 이들에게 구루-제자 관계를 주었다.

 

비록 이후 5년 동안 그의 책 몇 권을 더 읽은 것은 물론 손에 넣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영적 서적을 거의 다 읽었지만, 이번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 서양인 구루의 책이 했던 것처럼 나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내 안 어디에선가 내가 이미 깨달아 있으며 자유롭다는 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모든 종류의 일상적인 문제를 가진 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사람의 가르침과 모든 보다 전통적인 영적인 것들에 빠져 들었고, 그 다음에는 아드바이타(Advaita, 불이일원론)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아드바이타의 저명인사들의 책들을 읽었다.

 

내가 예전에 느꼈던 많은 혼란들이 해소되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이란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분리된 ‘나’인 것처럼 느꼈던 것일까? 빠진 고리는 무엇이었는가? 만약 내가 이미 깨달았고 자유롭다면, 왜 나의 삶은 종종 똥 무더기와 같아 보였던 것일까?

 

1997년 나는 토니 파슨스의 첫 번째 책 ‘공개된 비밀(The Open Secret)’을 읽었다. 나는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나를 런던의 한 집에서 열린 토론 모임에 참여하도록 초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깨달음’이라는 드라마 주위에 얼마나 많은 신비를 만들어 놓았는지가 분명해졌다. 토니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고 유머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그의 대답의 단순함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다음 해까지 더 많은 토론 모임에 나갔고 가능할 때 토니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를 나의 ‘스승’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하며 단순히 이미 나 자신인 의식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고 지적하였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토니는 우리의 참된 본성을 인식함에 있어 어떤 종류의 ‘이벤트’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1998년 9월 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정원 일을 하고 있었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내가 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나’라는 미묘한 느낌이 거기에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길가를 달렸는데, 그것이 마치 내 역할을 하는데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갑자가 ‘나’가 떨어져 나가자, 이해에 대한 모든 욕구가 사라졌다. 비록 토니가 의식으로서의 우리 본성을 인식함에 이벤트가 필요 없다고 지적했을지라도, 나는 미묘하게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 이벤트 또는 체험이 일어났을 당시, 그것은 ‘깨달았다는 승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나의 참된 본성에 대한 확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토니에게 전화를 걸어 흥분해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 새로운 ‘깨달았다는 승인’과 함께, 이야기는 ‘나’라는 관점이 아닌 명료함으로부터 발생하였다. 토니는 내가 더 이상 뭔가를 얻으려 하는 분리된 인물로서, 즉 탐구와 이해의 차원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라는 최면 상태가 미묘하게 돌아와 그 사건-정확히 ‘나’ 없음-을 ‘나의’ 깨달음, ‘나의’ 깨어남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거기엔 내가 기다려왔던 깨달음이라는 갑작스런 해방감-‘나’ 없음으로 발생한 지복감-에 대한 중심이 있었다.

 

나는 다음날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여전히 있었는가? 그렇다! 그렇지만, 며칠 후, 나는 해방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2, 3일 지난 뒤 그것은 다시 충만해졌다. 그것이 오락가락하고 ‘나’가 다시 나타나 그 자신이 없다는 사실에 매달리려 한 몇 주가 지난 다음, 나는 토니의 한 토론 모임에 나갔고, 거기 있음으로 해서 지복감이 다시 채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며칠이 지난 뒤 그것은 완전히 사라졌고 거기엔 ‘나’라는 최면 상태가 다시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해 토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동안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럴 즈음 나는 수년 동안 지속된 ‘나’ 없음을 기술한 한 여성의 책을 읽게 되었다. 얼마 뒤 그녀는 어떤 ‘스승들’로부터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병들어 사망했는데, 그녀의 한 친구가 쓴 그 책의 후기에서, 임종 즈음에 그 이벤트가 사라지고 ‘나’가 돌아오자 그녀는 혼란스럽고 좌절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문득 명료함에 관한 한 ‘나’가 갑작스레 사라지는 이러한 이벤트들은 사실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한 이벤트는 몇 초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가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이 ‘나’가 돌아왔을 때 일종의 상실감, 하나의 구별되는 인물이라는 얽매임의 감각이 다시 나타난다. 구별되는 인물로서, 이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더욱 일어나고, 탐구의 불안과 긴장 속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 들게 된다.

 

이제 모든 삶이 거대한 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늘 ‘앎’만이 존재하지만, 이 앎은 ‘나’라는 생각과 ‘나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다른 모든 생각들의 최면 상태에 가려진 것처럼 보인다. 의식으로서의 우리 참된 본성은 알아차림이면서 동시에 드러나 있는 현상이다. ‘나’는 다른 모든 다양한 이미지들처럼 그저 무대배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을 간파하거나 그것의 정체가 밝혀지면, 탐구와 긴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렇게 ‘나’를 간파하는 것이 반드시 갑작스런 사건일 필요는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삶의 놀이 가운데 일부처럼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듯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밀려드는 지복감보다, 존재의 자연스런 편안함이 부드럽고 점차적으로 드러났다.

 

혼란은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본성이 의식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이벤트나 갑작스럽게 ‘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인생 전체와 ‘영적’ 탐구가 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나는 이 모든 사안 주변의 혼란, ‘영성’과 ‘깨달음’이 단순한 명료함과 혼동되는 이유를 이해했다. 내 참된 본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떤 종류의 이벤트와도 관계가 없다. 어떤 종류의 이벤트라도 ‘나’와 생각이 만들 이야기를 간파하는 명료함 없이 일어난다면 쉽게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확실히 정원에서 일어났던 그 이벤트는 전혀 특별한 중요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벤트도 마찬가지다. 그 이벤트가 일어난 것은 단지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미 깨달아있다는 ‘승인’으로서 내가 얼마나 미묘하게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는가를 분명하게 보게 해주었다. 이 명료함은 ‘나’의 부재나 현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나’가 나타난다면, 그건 그것의 정체가 단순히 밝혀지는 것일 뿐이다.

 

이 짧은 이야기를 끝내자. 영적 탐구의 기간 동안 나는 이혼했으며,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했다. 내 두 딸이 학교를 다니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홀아비였다. 나는 켄트의 작은 마을에 거주하며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고, 최근까지 정원사로 그 지역에서 일했다. 삶은 지금 고요하고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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