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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불교TV의 버스웰교수의 강의(제18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다.

(불교TV 동영상 보기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1&PID=P662&DPID=63779)

 

 

한국에서 선(禪)의 시작은

 

9세기 말 경에 선이 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다. 이때 한반도에도 주요 선문들이 전승된다. 바로‘구산선문’을 말한다. 아홉개의 산악종파라는 뜻이다. 그런데 9개중 7개가 나중에 ‘임제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중국선종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임제종은 송나라 때 크게 번창한다. ‘홍주산문’이 있는데, 구산문중 7개 산문의 선사가 홍주산문 출신인 것이다. 마조같은 유명한 선사를 배출한 곳이다. 이 산문이 한반도에 선을 본격적으로 전승하는데, 법랑은 이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스님이다.

 

그런 법랑은 7세기 말의 스님이다. 그의 법맥이나 인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의 뒤를 잇는 인물은 9세기에 가서야 등장하게 된다. 매우 큰 공백이 있는 것이다.

 

만약 법랑이 실존 인물이어서 선을 한반도에 들여오고 ‘금강삼매경’을 썼다면, 선종의 세력을 넓히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9세기가 되어서야 선이 한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기 때문이다.

 

구원론적 성격으로서의 선(禪)

 

한편으로 경전적 전승과는 별개로 부처님과 직접 ‘이심전심’으로 전승을 받았다는 산문들이 있다. 이는 선종이 당시 주류불교와 스스로를 ‘차별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새로운 불교종파는 시대와 완전 분리된 진공상태에서 동시에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대 동아시아 불교종파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비루한 세속이 어떻게 깨달음의 장이 있을 것인지, 깨달음이 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 가까이 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런 관심은 선종에도 반용되었다.

 

선종은 가르침과 별외의 전승을 받았다고 하지만, 선 수행의 많은 부분이 불교 가르침을 ‘재구성’하여 동아시아인들에게 직접 와 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중국, 한국, 일본인들을 위한 것으로 본다. 이런 공동의 유산은 선의 가장 기본적인 ‘구원론’적 사상을 통해 표현된다.

 

 

달마대사가 썼다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라는 뜻이고, 견성성불은 “본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게송이다. 달마대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훨씬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달마대사가 한 말은 아니지만 ‘교외별전’과 ‘불립문자’와 함께 ‘선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견성성불과 여래장사상

 

교외별전과 불립문자가 교학종파와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선종의 독특한 ‘구원론’을 담고 있다. 즉,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와 “어떻게 부처님의 마음 그 자체와 다시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본래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는 이것은 무엇일까? 무슨 성(, nature)이 있는가? 부처를 이루기 위해 보아야할 성품은 무엇인가?

 

아마 이 게송을 보자마자 ‘여래장’에 대해서 생각이 날 것이다. 여러 면에서 여래장사상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우리 마음 안에 타고난 불성의 정수가 수동적, 혹은 적극적 형태로 존재하여,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불성을 ‘재발견’하여 각자가 부처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불성은 우리 마음 안에 내제된 힘으로서, 이 힘을 발견하면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견성성불은 이러한 여래장사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신성한 알아차림, 영지(靈知, numinous awareness)

 

선불교도 화엄종의 기초가 되는 불교전통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비록 선이 교학(특히 화엄종)과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선과 화엄종은 같은 여래장 사상에서 나온 근본적 통찰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래 성품이란 무엇일까? 보면 부처를 이루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성품을 이야기할 때 밝고, 빛나고, 맑은, 수행을 통해 얻는 ‘마음의 명징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의 근본적 맑음은 “스님들의 마음은 빛이난다”라는 유명한 싯귀로 표현이 되는데, 이는 빠알리어 경전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여래장 사상이 이 빠알리어 경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본래의 성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른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신성한 알아차림, ‘영지(靈知, numinous awareness)’를 말한다. ‘영()’은 영적인, 영혼의, 등의 뜻이다. ‘Numinous’는 이‘영()’자의 영어번역이다. 지()는 보통 지식을 뜻하지만 이 맥락에서는 일반적인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빛’이 나온다!

 

영지의 의미는 유정의 근본적 성질로 우리의 마음에서 빛을 발하며 우리의 감각, 우리가 보고, 듣고,느끼는 것을 비추어 우리가 이런 것들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이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은유도 아닌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우리 사는 세상을 아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유정(有情그 자체, 의식 그 자체는 마음이 발하는 빛으로 외적인 감각영역을 비추어 이 감각영역에 있는 대상의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즉,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시각영역을 밝게 비추어 외부의 대상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한다. 유사한 빛이 귀에서도 나와 청각영역에 있는 대상을 비추어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감각기관에서 다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감각대상이 감각기관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불교 전통에서는 마음의 유정이 감각을 통해 외부로 투사되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감각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임제의현같은 스님도 “수행자들은 지금 바로 모든 사물을 생생히 비추어 세상을 지각하며 삼계의 존재에 이름을 부여한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만물을 밝게 비추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모두 유정을 지녔기 때문에 세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만 감각을 가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어느 정도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세상을 지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잠재성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증거로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의 자질은 생생한 빛의 근원으로 너무나 밝아 바깥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불성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유정 그 자체가 깨달음의 한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명상이란

 

선불교에서 명상수행을 통해 마음을 개발한다는 것은 이 빛나는 자질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항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자질을 말한다. 지금은 아직 약해 우리가 그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 정도이지만, 이 빛을 더 밝게 하여 여기 형광등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탐조등 정도가 된다면, 그 빛이 너무 강하여 빛이 사물을 통과할 정도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중전등을 비추면 사물을 볼 수가 있지만,만약 아주 강력한 회중전등을 손바닥으로 막으면 빛이 손바닥을 통과할 것이다. 아주 밝은 회중전등이면 가능하다.

 

마음이 수행을 통해 점점 더 빛이 나면 타고난 밝음이 더욱 더 강해진다고 한다. 이 밝음이 강해지면 대상을 투과할 정도로 빛을 발하며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본질을 ‘공성’으로 본다. 따라서 마음의 빛이 아주 강해지면 감각을 통해 빛이 뿜어져 나와 지각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가 보통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의 거대한 공성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 original face)이란

 

선종이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부처님으로 부터 조사들을 거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선종이 ‘본래면목(本來面目, original fa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본래면목이 부처님에서 시작하여 조사들에게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부처의 마음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유정이다.따라서 바로 이 순간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 우리 주변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각자 모두의 마음 안에 내재한 불성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영지, 신성한 알아차림으로 돌아 올 수 있을까? 종밀선사(780-840, 당나라, 화엄종5조)의 글이 있다.

 

부처를 이룬다는 것

 

종밀은 한국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승이다. 그는 알아차림, 지(知)라는 이 한 단어가 모든‘경이의 원천’이라 하였다. 외부의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외부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경이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외부적 현실의 근원은 불성 그 자체, 마음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종밀은 수행자가 외부로부터 시작하여 빛의 근원인 내부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반조(返照, trace radiance )’라는 개념이다. 즉, 외부의 차원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유정은 감각을 통해 바깥으로 향하여, 외부를 비추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데, 이 빛남을 자신에게로 돌려 마음의 중심을 비추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늘의 햇살을 보고 그 햇살을 따라 빛의 근원인 태양을 보면 너무나 밝아 쳐다 볼 수도 없다. 햇살은 볼 수 있지만 태양 그 자체는 너무 밝아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본다. 역시 밝게 빛나는 마음의 중심에서 빛이 바깥을 향해 발산되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준다. 그 빛을 외부 세계에서 시작하여 되돌이켜 따라가,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게 되면 부처를 이룬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승인 ‘유일’이 사용한 비유이다.

 

이 같이 빛나는 마음의 중심이 바로 영지이다. 늘 바깥으로 빛을 발하여 여기 있는 사물을 볼 수 있게끔 한다. 이 빛을 안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를 다른 말로 ‘회광(廻光)’이라고 한다. 빛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이다. 빛의 방향을 돌려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조이다. 그러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한다.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빛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양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선불교는 영지와 영지를 통해 지각되는 외부 대상과의 차이를 이용하여 여러 불교 전통의 가르침을 설명하였다.

 

보석(jewel)과 칠흑(blackness)의 비유

 

종밀은 이 영지와 외부 감각 세계와의 차이를 보석(jewel)과 칠흑(blackness)과의 차이로 비유하였다.

 

밝게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시꺼먼 타르에 집어 넣으면 보석의 빛은 칠흑같은 타르에 완전히 가려지게 될 것이다. 타르는 도로에 까는 아스팔트 같은 물질이다. 여러 불교 전통이 부처님의 사상과 수행을 묘사하는 방식이 이 보석과 암흑의 은유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

 

빛나는 보석은 보석을 둘러싼 타르의 암흑을 반영하여 완전히 시꺼멓게 보인다. 망상으로 가득 찬 평범한 중생의 마음도 마찬가지이어서 영지가 착각과 어둠으로 보일 것이다. 과연 보석을 둘러싼 타르로 인해 보석자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 다른 관계가 존재할까? 종밀이 이 비유를 다르게 사용한 예도 있다.

 

어떤 종파는 보석이 타르 속에 있으면 타르로 완전히 시꺼멓게 가려져 타르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보석의 타고난 광채가 회복될 것이다. 따라서 타르안에 다이아몬드가 다시 빛나려면 타르를 제거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르고 씻어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타고난 광채가 회복되는 것이다. 타르가 모두 제거되면 주변의 다양한 색채를 반사하며 밝게 빛을 낼 것이다. 이 모델은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북종선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들은 보석에 묻은 검정 때가 실제 존재하며 여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본다. 즉, 마음의 번뇌는 그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번뇌가 깨끗이 제거되어야만 마음의 타고난 광채가 회복되는 것으로 본다. 번뇌는 실체가 있으며 이를 제거해야만 마음의 타고난 광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종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보석이 타르로 덮여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종파도 있다. 보석도 타르도 모두 공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중론학파가 여기에 해당된다. 선종의 ‘우두종’도 마찬가지이다.이들은 모든 것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깨달음과 번뇌도 모두 공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 둘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

 

종밀은 이러한 접근법이 ‘기능’이라는 측면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마음의 정수가 무엇인지에만 집중하여 마음이 주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석은 공한 것이다. 하지만 보석과 타르로 덮인 보석은 큰 차이가 있다. 그 기능이 아주 다른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공하다고 간단히 선언해 버리는 것만 가지고는 마음의 광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밀은 선종 홍주산문의 가르침이 보석과 타르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보석이 타르이고 타르가 곳 보석인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문제는 시커멓게 덮이지 않은 보석과 시커멓게 타르가 덮인 보석은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기능의 문제로 돌아온다.

 

회광반조와 선불교의 수행

 

종밀은 따라서 이상적인 은유로서 보석은 원래 광채를 타고 났고 보석에 타르의 검정색이 비추어지는 것은 이 타고난 광채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해되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보석은 광채를 타고 났으며 이 광채는 타르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르의 검음에 실제적인 차원에서 대응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실존하는 검음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타고난 광채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밀은 그 방법이 바로 ‘반조’라고 주장하였다. 내 주변 세계에서 시작해서 빛을 그 근원으로 되돌려 마음의 본성을 비추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이 시사하는 것은 수행을 할 때 이런 것들, 외부의 번뇌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타고난 광채를 회복하기 위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 외부로 향했던 이 빛을 그 근원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의 본성을 보게 되고 부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선불교가 수행을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는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관점이다. 그 차이점중 하나는 선불교가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교학적인 전통, 특히 화엄같은 전통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선은 수행의 경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는데 훨씬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교학종파들의 복잡하고 장황한 철학적 사상 보다는 선은 깨달음의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은유를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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