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제목
> 커뮤니티 > 원장님칼럼

나를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조회 수 1235 추천 수 0 2015.08.28 10:05:39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이해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보다는 남들을 살피거나, 비교를 통해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문화에 길들여져 왔다. 가족의 구성은 핵가족화 되어 가면서 기존의 가치와 전통은 고리타분해졌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체계에 따르지 못하는 교육제도는 아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사회에서 자신을 찾고 스스로를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점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도박, , 쇼핑, 게임, 성공, 스포츠, 외모 가꾸기.....등등)되어 가고 있다. TV의 연예인이나 상업적인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인 성숙의 방향보다는 물질적 가치로 최면 시키고, 존경 받지 못하는 사회지도층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탐욕은 젊은이들이 나아갈 방향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또한 교육과 가족에 대한 기존의 가치가 해체되면서 꿈을 상실해가는 우리들은 점점 신경증을 부풀리는 사회적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물질적 성공과 성취에 중독된 삶은 감정적 공감력을 상실하여 자기중심적 자기도취에 빠져서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만이 생존하면 된다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고립된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관계의 친밀감과 교류의 연대감은 점점 약해져서 사회적 소외감은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빠지게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심리적인 혼란과 정체성의 상실이 최고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왕따 문제와 학업성취와 비교로 힘들어하고, 꿈을 잃은 대학생은 나아갈 방향성을 상실하고, 결혼문제와 이혼문제는 벌써 사회적 이슈화 된지 이미 오래이며, 이제 고령화와 다문화와 같은 실제적으로 사회가 감당해야할 문제들이 엄습하고 있다. 문제는 커져가고 있으며 개인의 혼란과 불안은 가중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닌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대안이나 방향성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하였다. 결국 자신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아는 것이다. 내안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은 각자 개별적으로 나누어져 있어 서로에게 특별한 것 같아도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가진 같은 경험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아십니까?”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모름을 안다함은 무엇에 대해 모르는 무지의 마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물을 보는 열린 마음을 얘기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라고 할 때 는 육체의 와 에고의 그리고 영혼의 가 있다. 몸의 는 식욕과 성욕과 수면욕을 지닌 본능에 기초한 동물적인 를 말한다. 동물은 생존과 종족의 번식을 위한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 마음은 자아또는 에고라고도 하며 불교적인 용어로 탐진치의 를 말한다.



탐은 되려고하는 욕심의 마음이며 진은 욕심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불편해하고 저항하며 분노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치는 에고 스스로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공처럼 자기를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에고의 수준에서는 자신이 지닌 탐진치를 얼마나 많이 충족하느냐에 따라 에고는 확장되고 정당화되면서 자신을 그것들과 동일시한다.



영혼의 는 하나님의 또는 얼의 라고 하며 우리내면에 들어있는 불성과 신성을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얘기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에덴동산의 삶이 몸의 즉 본능의 의 삶이라면 에덴동산의 추방은 이원론의 즉 마음과 분리로의 여행이다. 하지만 그 선택과 추방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길을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 같이 우리안의 하나님과 진리인 영혼의 가 무엇인지 알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물론 우리는 에고의 뜻을 선택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 수 있는 자유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에고는 하나님의 실재 속성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연속 속에서 이원론이 만든 환영과 같다. 진실이 아닌 것은 깨어지기 마련이며 순리에 따라 깨어지려는 것을 놓지 못하고 붙들려할 때 마음은 고통이 된다.



우리의 고통과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의 미래도 같겠지만 외부를 보고 판단하는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다른 경험을 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경험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어떤 경험이라 하더라도 경험은 그 자체로 온전하며 완전하다. 신은 우리에게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나누지 않으며 삶의 경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살라고 한다. 여름이 되면 더위를 경험하고, 겨울이 오면 추위를 경험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며 햇살이 나면 햇살을 즐기면 된다.



하지만 마음은 인생의 경험을 경험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분별심으로 나누려한다. 인생이 연극 무대와 같다면 좋은 연기자는 때로는 노숙자도 연기해보고, 돈이 많은 재벌이나 갑부의 연기도 잘해야 한다. 노숙자의 연기란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최선의 연기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은교라는 영화에서 박해일이라는 연기자는 70대의 노인을 연기하기 위해 8시간의 분장과 나이든 사람의 연기를 위해 많은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다.



신이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객이라면 신은 우리가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보다는 자신이 맡은 배역과 연기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고 묻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배역과 되려는 역할만을 탐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한 현재의 자기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다른 사람의 배역을 탐내거나 훔쳐보려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문화가 가진 가치체계와 비교를 통한 되려는 문화의 소산이 아닌가한다.



이런 되려는 마음을 욕망이라 한다. 물론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른 체 다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은 내면에 언제나 텅 빈 공허감과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허락한 자신으로서의 온전한 존재를 부정하고 다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은 끝없는 행위의 중독과 과도한 성취의 갈증을 낳게 한다. 현재 잇는 그대로에 대한 자기부정은 외적인 완벽주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하며, 예민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인간의 연약함으로 여겨 감정을 부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행위로서 보여 지기 이전에 그냥 로서 존재한다. 존재의 중심에 서지 않은 모든 행위는 존재를 부정하는 자기기만이 되기 쉽다.



지난날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엇인가 되어야지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특별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돋보이고 싶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하찮게 여겼고 다른 사람이 지닌 장점들과 능력들로 나를 포장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에 거짓된 모습을 꾸며 놓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자 감정을 통제하고 성취로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나의 시선은 언제나 남들을 살폈으며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인정하지 않거나 약간만 비난해도 내 인생은 마치 견디기 힘들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나는 나의 존재를 잊고 행위에 중독되어 있었다. 오랜 방황과 혼란으로 나는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듯이 행위에서 존재로 돌아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나는 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들임을 또한 잊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생각과 내 감정과 내 느낌으로 돌아와 내 것은 내가 책임지고, 상대의 감정과 생각과 느낌은 그들의 선택임을 존중하게 되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행위와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인정받는데 길들여져 왔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의 내면이 원래 결점이 있고 문제라고 느낀다면 외적인 행동과 성취의 어떤 변화도 우리를 좋게 바꿀 수는 없다. 존재를 잃어버린 잘못된 성공에 대한 신화의 최면은 우리내면에 더 많은 공허감과 고립감을 부추긴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불안하다.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누구나 정신적 혼란과 신경증의 피해자 일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행위 이전에 자신의 존재함 그 자체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이해함은 자기기만이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희생임을 알아야한다. 나를 받아들이는 마음은 조건이 없는 받아들임이다. 그냥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자기감정과 생각과 느낌을 받아주는 마음이다. 그곳에는 기준이나 옳고 그름이 없이 지금 이대로 받아들임이다. 받아들임은 열림의 마음이다. 스스로 어느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렸는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가슴을 좀 더 편히 열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열려있고 나의 가슴 또한 언제나 열려있다. 단지 상처받은 아픔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고 내 가슴을 막았을 뿐이다. 내가 닫았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줄 때 응어리진 상처의 벽은 녹아내리고 본래의 사랑이 드러남을 나는 안다. 상처의 벽이 녹은 자리에는 사랑의 소중함을 더욱 꽃피게 하는 따뜻함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차이는 있을지라도 상처를 가지고 있다. 상처는 받아들이면 상처가 되지 않는다. 받아줄 수 있는 그 마음이 용서이다. 용서는 남에 대해서가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대 가슴에 있는 사랑이 온전히 꽃피어나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5 단식에 들어가면서.... 원장 2015-08-31 885
294 삶은 삶이고, 산은 산이다. 원장 2015-08-29 1097
293 춤추는 공과 노래하는 깨달음.... 원장 2015-08-28 898
» 나를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원장 2015-08-28 1235
291 깨달으면 어떻게 되나요? 원장 2015-08-23 1017
290 증상과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 원장 2015-08-19 986
289 무엇이 나라고 하는가요? 원장 2015-08-13 876
288 나는 누구인가요? 원장 2015-08-13 1062
287 벌거벗은 임금님.... 원장 2015-08-08 1105
286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 원장 2015-08-07 984
285 올바른 의지를 가져라... 원장 2015-08-06 1204
284 '~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원장 2015-07-30 1068
283 알아차림은 예고없이 온다. 그리고 또한 지나간다... 원장 2015-07-28 1136
282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마음.... 원장 2015-07-26 975
281 에고의 정체를 아는 것이 자기발견이다. 원장 2015-07-22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