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 선생님의 말씀 중 생명에, 남자 여자에 이름을 붙이고 서로 손을 잡는다면, 불편함이 일어난다. “어떻게 낯선 남자가 여자 손을 잡아? 이거 성희롱이야!“ 순간 관념이라는 것에 머리를 때렸다.
중간중간 선생님께서 내 마음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냐? 왜 좋은 사람이려고 하지? 나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 좋은 사람이라는 틀을 쓰니, 내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었다.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 나에게 폭력을 하는 사람. 등등 사실 내가 나를 관념 지음으로써 나를 가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반대인 사람들을 ‘저항’ 했고,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야이 똥멍충이야!” 순간 내 마음이 요동을 쳤다. “내가 왜 똥멍충이인가” 나는 멍청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내 안의 관념이 잡혔기 때문에 내 마음에 불편함이 올라왔던 것이다. “그리고 야이 씨발로마”라는 말을 탁 듣고 또 내 마음이 요동쳤다. 금기시하는 욕을 나한테 하다니! 그때 또 나는 불편함이 올라왔다.
근데 그 불편함은 어디서 왔는가? 저 욕인가? 저 말인가? 저 소리인가? 사실 내가 나를 관념으로 틀 지어있기 때문에 나는 ‘불편한’ 것이었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관념들이 있었구나. 그래서 관념에 쌓여진 만큼 내 안에 저항성이 컸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모든게 나의 내적 고통이었구나. 관념의 틀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내 머리는 선생님께 여러대를 맞았고, 또한 내머리가 하애졌다. 나는 어떤 관념 속에 살았지? 나는 도대체 뭔 생각으로 살았는가?
명상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어맡김’에 대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이어 떠올랐다. 누가복음 중「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이 말씀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인성은 고난의 길을 거두어 달라고 했지만, 예수님 안의 신성(하느님)은 하느님 뜻대로 하시라는 그 마지막 말에 갑자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하려고 했구나. 내가 나를 정화하고, 알아차리려고, 내 힘으로 나를 내려 놓으려고 했구나. 그러니 힘들 수밖에. 어려울 수밖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내가 해야 한다는 그 관념에 내 안의 신성이신 하느님이 가려져 있었구나. 라고 생각이 드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내 안의 하느님이 하시도록... 내가 무엇을 한다는 건가? 나는 뭘 했던건가?
한참을 울면서 운전을 하다가, 미사 안에 성체 성사의 말씀이 떠올랐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려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내안의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것으로 나를 힘껏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그 하느님을 가렸구나. 사랑은 저 밖에 아니라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미사는 저 밖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내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내 죄(자아)가 사해진다는 것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