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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 한바다님

조회 수 2984 추천 수 0 2008.06.03 08:07:55
법문은 진리에 대한 가르침(말)이다.

해피타오는 자유롭고 발랄함 가풍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 자신도  독창적이고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해피타오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어요’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데, 자신들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외곬수적 고집과 고지식함, 종파적 폐쇄성, 이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간이 변화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도 유효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다.

어찌보면 해피타오는 고집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진화하는데 이런저런 방법이 필요한데 사람마다 다양한 툴(tool)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입장이기 때문에 해피타오만의 수련이 뭐냐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해피타오 수련체계이며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라는 것은 진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는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것’이다.

우리가 어떤 수련법이든 다 마음을 써서 하기 때문에 모든 진리는 마음으로 비춰지게 된다.
마음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방법 자체보다는 그 어떤 수련법을 행할 때 쓰는 마음과 정성을 얼마나 기울이냐에 따라 변형이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한다.

원리를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법에서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명상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라는 것은 나하고 대상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한 맥락과 같은 것이다.
초점같은 것.
인간관계에서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명상을 할 때 그명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 집중할 수 있다.
의미를 통해 본질로 들어갈 수 있다.
거기서 본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의미 부여하는 것을 만난다.
또 하나는 의도이다.

의미라는 게 사실은 ‘그쪽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약간 혼동될 수 있는 것이 내가 내는 의미도 있을 수 있잖아요.
내가 내는 의미와 내게 다가오는 의미가 안 맞을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는 의미가 안맞다는 것이죠.
내가 내는 관계가 그쪽에서 내는 것과 본질적으로 안맞다는거죠.

모든 인간관계는 의미부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미가 없다고 하면 관계가 깨질 수가 있다.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의미의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여러분이 더 조화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

둘째는 의도가 있는데, 의도는 나한테서 나가는 것이다.  
내가 욕망에서 어떤 것을 전달하려는 뜻을 가지는 것인데, 예를 들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행동을 하는데서 의도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의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욕망-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또 편해지고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욕망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쓰는 의도가 다 다르다.
욕망은 비슷한데 욕망을 전달하는 의도성은 다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 가치관이 다 다르기 때문에 내 의도는 독특하다.

이 독특한 의도를 상대방은 내가 말 안해도 알아주겠지 하는 생각을 가질 때 대부분 다 실패를 한다.
그러면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아, 의미가 없다 해버리면 단절이 들어온다.

인간이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지구상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어떤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고자 한다.
근데 닫힌 구조로 가는 순간에 관계의 의미를 깨버린다.

의미 없다고 단정하고 피해의식이 올라온 순간,  그때 내가 내는 의미의 입자에 어둠이 깔리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한다.
안 만나도 된다, 그 순간이.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식으로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내가 내는 의도가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나만의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잘못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
잘못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더 호의적으로 내 의사를 전달해야 되나’ 하고 더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여러분들! 항상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견지하라. ‘어떻게 하면 나와 상대방, 상대방이 속한 단체나 동아리가 더 좋아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적이고 건설적일 수 있다.  
내게 올라오는 피해의식에 대해  ‘이것이 바로 내가 상대방에게 내고 있는 의미에 대한  메카니즘이 만들어내는 것이구나’를 알고 자유함 속으로 가게 될 때 내공이 생기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것에 안흔들리고 꿋꿋하게 갈 수 있는 내공,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런 내공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내공이, 내 안에 있는 내공이 상대방 사이에서 정성으로 갈 수 있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삶의 의미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의사와 의도를 잘 조율해 가면서 서로의 발전을 도모해 가야 한다.

그러러면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상처를 안주고 안받으려면 관(觀)을 해야하는데, 첫째 자 글쎄 이 부분에서 왜 의미와 의도를 얘기하는냐 하면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을때 다가서고 물러서는 모든 것에서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안주려면 , 더불어 상대방의 반응도 알면서 따뜻하고 친절함으로 조율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관을 하기 위해  동남아로 위빠사나를 하러 간다.  
우리는 삶속에서 인간관계에서 지지고 볶이는 이 속에서 진정한 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관해야 하는가?
첫째는  내가 어떤 마음을 내는가, 어떤 의도와 태도로 다가가는가를 관해야 하고
둘째는,  상대방이 내 말과 행동과 태도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지, 착각하고 있는지 이것까지 보면서 그래서  상대방이 가장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 줄 것인지 알면서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낼 수 있도록 조율해 가는 것, 이것이 역동적인 거다.
그러면서  진정한 만남의 장으로 갈수 있다.
그때에 내가 조화롭고 내가 즐겁고 내가 신뢰에 차있고, 이럴때는 상대방과 잘 어우러지게 돼 있다.

이 때 기쁨으로 하는 것, 기쁨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모든 만물들이 기쁜 것을 좋아한다.
사랑을 좋아한다.
그런 마음이 나갔을 때는 호(好)가 나오게 돼 있다.
내 마음의 파일이 즐거움을 내고 있는가, 아니면 고통을 내고 있는가를 잘 봐야 한다.
호를 개발해야 한다.
우주의 기운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통해 열리게끔 해야한다.
중요하다. 수련방법이 너무나 고통스러우면 누가 하겠어? 다 도망갈거야.

원리적인 것을 말하자면 감사와 사랑이 원리적이다, 진리적이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하지 못할때는 내게서 나가는 에너지 파장이 굉장히 떨어지게 돼 있다.
낮은 파장으로도 의사전달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불만이나 이런 것도 때때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늘 거기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는 거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내 불만을 얘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감사와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다.
왜그러냐 하면 내가 감사함으로 감사함이라는 마음으로 갈 때는 제일 높은 차원의 꼭지가 열리게 돼 있다.
백회가 열리게 돼 있다.
여기를 통해 영성의 기운이 들어온다.
감사할 때 여러분이 열리게 돼 있고 여러분한테 나오는 파동이 다르게 된다.
그 다음에 사랑은 감사함을 통해 천기(영기)가 들어오니까 그게 내 심장, 영적인 심장을 통해 사랑을 내보낼 수 있다.
감사함으로 형성된 사랑의 에너지를 내보내게 되면 여러분 안에 높은 진리적 흐름의 에너지가 생기게 된다.

호흡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감사함으로 하라.
그 다음에는 기쁨이다.
체험을 할 때 기쁨이 경험될 수 있도록, 기쁨이 여러분에게 흘러나올 수 있도록 해야한다.
우리는 기쁨이라는 것이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쁨이라는 것은 몸안에서 생명에너지가 잘 돌아가면 그게 기쁨이 되는 거다.
특히 이 안에 있는 정호르몬이 잘 돌아가면 그것을 피지컬에너지 차원에서 기쁨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을 욕망적(성적)으로 너무 흘러내버리면 몸이 별로 안 좋아진다.
이 기쁨의 에너지를 몸 안에서 순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명상이다.
그게 몸 안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기쁨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지복이다.
아까는 사랑과 감사를 얘기했는데 이것을 오래 계속하면 이게 보살, 붓다가 되는 길이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내보낸다.
이게 가장 고도의 수행이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다시 방법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자.

그 다음에는 밑의 땅의 기운(생기)을 자신감으로 받아들여 흐뭇함, 기쁨으로 내는 것, 이 두 부분이 조화가 되야만이 여러분 안에 진리적 기운이 순환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많은 부조화된 업장과 몸안의 독소가 사라지고 내가 진리체로 변해가게 된다.  
여러 명상법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내보내라는 이것만 말하고 싶다.
어떤 생각이 떠오른든지 그것을 외면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어떤 생각이라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내보내라. .......... 새소리가 들린다......... 새소리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감사함으로 들어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내는 마음은 사랑을 담아서............ 새한테 노래를 하든지 대화를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내보낸다........... 벌써 여러분들의 크라운 차크라가 약간 열리고 진동하기 시작한다. 아주 미묘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천기가 들어온다.

천기라는 것은 사실 식물들의 파장이 하늘의 기운을 빨아들여 내보내고 있는 거다.
식물들이 없다면 우리가 하늘의 기운을 못받아들인다.
백회의 기능이 그것입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저 위의 파란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에너지이다.
그것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올 때 사랑이다.
하늘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형시켜서 내 보내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의 근원은 사랑의 근원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자비는 사랑을 행동화한 것이다.
티벳불교의 수행이 바로 이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 어떤 기운, 나쁜 기운이라도 받아들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내가 내는 것. 그런데 나쁜 기운이라고 생각할 때 독이 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천기, 진리적 기운으로 바뀐다.

그 다음에 호흡법을 얘기한다. 호흡을 할 때 우리가 코로 하지만 진리의 호흡은 백회와 뒤에 있는 명문으로 한다. 진리적 호흡은 감사함이라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호흡을 할때 내가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 호흡을 하게 됨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감사함으로 마시고, 내쉴때는 사랑으로 내쉬고.....

우리 속에는 때가 많이 묻어 있다.
피해의식이나 분노나 집착, 두려움 같은 때들이 묻어가지고 - 나라는 상에 초점을 맞춰 거기에 때가 묻어 있다.  
진리체(眞理體)와 존재는 우리 속에 이미 존재하는데도 때들이 막고 있으니까 진리의 몸이 가동을 못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얘기했고,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있다고 얘기했고, 부처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견유불성(犬有佛性)을 얘기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 안의 부조화된 마음, 기운이나 독소 등을 정화를 스스로 할 수 있을때, 우리 인간의 진리체 몸이 살아나면서 진정한 진리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계속해서 이런 수행을 하다보면 오장육부가 바뀌고, 피도 바뀌고, 그 다음에 간장이나 골수, 정이 바뀌고, 뼈가 바뀌기 때문에, 거기서 사리가 형성되게 된다.
이것이 오래 되다보면 맑은 진리의 기운이 엉기게 되고, 그것이 결정화되기 때문에,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남게 된다.
그 사리들을 보면 업장소멸이 많이 되고, 나중에는 환희가 엄청나게 생기게 된다.
우리 생각이나 집착이 엄청 강하기 때문에 불에 태워도 안 없어진다. 집착 또한 그러하고, 내가 선한 마음이나 진리에 대한 어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것이 결정화된 에너지가 사리인 것이다.


인간의 상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강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세속적인 집중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물현화시킨 것이다. 그게 이생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부터 거기에 에너지를 쏟고 집중한 결과 그 사람들은 현재 그 쪽이 발달된 거에요.
우리들은 주로 도닦은 쪽을 발달시킨 것이기 때문에 이쪽으로 온거야. 우리가 투자한대로 이루어진거야.
그러니까 현재의 나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공평하다.

공평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하늘이 이루어준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떠하든간에 여러분이 많이 원했던 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게 바로 하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이루어 준 것이기 때문에 감사해라, 하늘이 이루어 준 것에 대해. 그러니까 사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들이 원하고 집중하는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원하고 집중하는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스로를 원하는대로 만들어보는 기적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잘된 사람, 부자들을 용서해 줘요. 일단 지가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이 하늘의 뜻인데 어찌할거야.
그러므로 ‘하늘의 뜻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게 하는데 있으므로 내가 감사하게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일때 조화와 믿음 속에서 모든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기도하면서 나아가세요. 여기까지 감사와 사라의 법칙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다음에는 불교일반에 대한 간단한 이해와 티벳불교사를 좀 얘기한다.

의미를 잘 알아야 감흥이 일어나고  체험이 일어난다고 하잖아. 예를 들어서 붓다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붓다의 사리를 만나더라도 아무런 감흥을 못일으킬 수 있다. 전시되는 사리의 반이 부처님의 사리와 그 제자들 사리이고 나머지 반이 티벳 고승들의 사리이다. 의미를 어느정도는 알아야 그 에너지를 받아낼 수 있는 수용체가 생긴다. 티벳불교을 얘기하기 전에 전세계 불교에 대해 잠깐만 얘기하겠다. 나도 사실 다 모른다. 우리는 사실 체험을 하는 것을 원했고 깨침 자체를 원했지, 이거 역사적으로 어느 분이 뭘 가르치고 하는 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다보니 여러 가지 이론이 혼란스럽게 나오고 있고 그것을 좀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로 불교의 시조가 누군가 ? 석가모니다. 석가모니는 샤키아 무니, 샤카아는 석가족 즉 종족을 말하고 무니는 침묵하는자 즉 명상하는자를 뜻하고 그 외의 뜻은 성자라는 뜻이다. 실제 석가모니의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는 한문으로 싯달타잖아. 붓다는 석가모니로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깨쳤다라는 뜻이다. 눈을 떴다, 한국말로 보다라는 말과 어원이 비슷하다. 깨달았다, 보았다, 보디(bodhi)라는 말이다. 보디(bodhi)가 깨달음이고 붓다는 보디(bodhi)야라는 산스크리트에서 나왔다. 존칭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깨닫고 나서 보니까 자기보다 먼저 깨친 분들의 맥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앞서 깨친 존재가 있었다. 그 분이 누군가? 가섭불, 카샤파 붓다의 사리가 하나 있다. 뉴질랜드에서 2001년도에 하나 불어나서 하나는 영국으로 가고 하나는 한국에 왔다.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가 설했다는 가르침이 뭐냐 하면 모든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가섭불이 티벳에서 왔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가섭불이 원래 한국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티벳근처의 거기에서 왔으니까. 그러고 나서 부처가 깨친 가르침을 설해놓은 것이 경전들이다. 근데 그 가르침 중에서 부처가 수많은 말을 하고 수많은 방법을 알려주고 다 똑같은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니다. 큰 교단을 형성하기 위해서 삼법인의 가르침을 설하기는 했지만 각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이 사람에게는 이런 가르침을 저 사람에게는 저런 가르침을 펼쳤다. 이것을 대기설법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경전을 결집하기 시작한다. 그 경전을 결집할 때 참가하게 된 사람들이 500아라한들이다. 아라하트(산스크리트어)의 아라한은 부처의 말로는 자기와 동등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다. 붓다는 한 사람의 스승을 말하고 붓다 밑에서 깨친 사람을 아라하트라고 한다. 그래서 붓다 밑에서 500아라하트가 나왔다. 근데 문제가 생겼는데, 제일 부처님 말을 많이 들은 사람 있잖아. 아난존자인데,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이고 데바닷다의 동생이다. 부처도 삶이 비극적이다. 자기 사촌동생이 자기에게 반대하다 죽었고 장인과 처남이 자기에게 반대하다 땅이 꺼져 죽는다. 그래 부처는 붓다에 반하는자는 저렇게 죽게된다고 경고를 하게 된다. 그 정도로 붓다는 가정적으로 비극을 겪었다. 자기는 깨쳤는데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촌과 장인과 처남의 반대, 그들의 죽음.... 아난이 아주 잘 생기 미남이었던 탓인지 여자들 유혹도 많이 받고 하다보니 못 깨쳤다. 부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들었고 기억력이 좋았다. 경전을 결집할 때 가섭장로가 주도했는데 가섭의 나이가 붓다보다 많았고 가섭자신의 제자가 5천명인지 3천명인지 그랬다. 붓다종단의 스승들 중 가섭과 사리불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가 이들이 대스승인 붓다에게 귀의하자 같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종의 영적인 M&A이다. 옛날에 나한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어쨌든 가섭이 경전결집때 아난을 못깨쳤다는 이유로 못들어오게 한다. 이것이 가섭의 배려였다.  아난은 ‘부처의 곁에서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구나’ 하는 경각심이 일어 절실해졌다. 그래 아난이 혼자서 위빠사나 경행을 밤새워하다 미끄러진 순간 깨치게 된다. 선가에서는 좀 다르게 전해져 온다. 깨금발을 들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무아를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후 경전결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난존자 포함해서 500아라한인데, 10대제자 외 다른 500아라한들은 이름이 없다.

여기서 내려온 게 동남아에 내려온 것이 상좌불교- 테라바다이다. 수행하는 승려를 테라폐디라고 하는데 이 쪽을 상좌부(上座部)라고 하는데 소승불교(小乘佛敎)이다. 수행법은 비파사나인데, 관법(灌法), 보는 것인데, 사성제, 삼법인(三法印)을 보는 것이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이)다. 이것을 앉아서 계속 보는 것이 관법이다. 또 사마타가 있는데 사마타는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을 평안하고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매이다. 비파사나는 지혜가 생긴다. 사물이나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지혜....진리에 입각한 지혜를 관하는 것, 이런 전통이 미얀마, 태국에서 전해져 오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다. 이것이 동남아 불교이고 전세계적으로는 4개의 불교갈래가 있다. 하나는 동남아 테라바다 전통에서 내려오는 소승불교(히나야라/ 대승불교인 마하야라에 대비시켜 칭한 개념)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동남아 불교이다. 미얀마와 태국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가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초창기이고, 그 뒤로 인도의 코살라국(수많은 전쟁을 치룬 나라)과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잔인한 전쟁 속에서 살육을 많이 한 왕으로 이를 씻고자 불교에 귀의하게 됨. 전륜성왕이라 불림. 원래는 붓다가 전륜성왕의 인연을 타고났는데 붓다가 깨쳐버리니까 세속적인 전륜성왕이 나온 것이다.)에 의해 불교가 퍼졌다.

2천 500년 전 붓다가 태어났고, 아쇼카왕에 의해  인도전역에 퍼진 불교가 동남아시아로 내려오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까지 내려갔다. 널리 퍼졌음에도 민중들에게 불교는 어려웠다. 가장 어려운 개념이 무아였다. 민중들은 불교와 멀어지고 귀족화된다. 그러다 밀교가 민중들 사이에서 성행하게 되고 나란다 절에서 밀교가 꽃피우게 된다. 민중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밀교가 퍼지게 되는데 6-7세기경 이슬람의 습격을 받으며 불법이 소멸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을 예견한 인도 스승들이 티벳에 불법을 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티벳인들이 인도에 와서 불법을 배우고 티벳에 이것을 전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마르빠다. 마르빠는 불경을 번역한 역경사이다. 마하무드라의 전통이 인도에서는 없다. 나로빠, 틸로빠를 이어 마하무드라의 전통을 이은 마르빠가  3번 이상 목숨을 걸고 인도를 여행하면서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엄청난 신통력으로 티벳에 퍼뜨렸다. 인도에는 마하무드라의 전통이 남아있지 않지만 마르빠에 의해 티벳에는 이 전통이 전해졌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 티벳의 전통적인 종교는 뵌(본)교로 우리나라의 무당파, 칠성교에 가깝다. 텐산산맥의 티벳고원에서 연원한 것이 자연숭배, 정령신앙과 우리나라의 개천사상이다. 재세이화, 광명이세 이런 것들이 칠성교와 비슷하다. 칠성교는 무당파로 내려온 것이고 거기에서 재세이화, 광명이세는 영적 엘리트들이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티벳에서 칠성교가 본교로 내려온 것이고 삼태극을 쓰고 있는 것, 샤먼의 의상이 우리와 비슷하다.

불교를 처음으로 티벳에 전한 이는 파드마 삼바바(연화생)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붓다보다 높이 친 인물이다. 이 분의 저서가 티벳사자의 서를 번역했고, 파드마 삼바바의 해탈의 서가 있다. 서양에서는 유명하다. 파드마 삼바바가 이룬 법맥이 닝마파이다. 그의 아내가 예셰초겔이다. 전시회에 예세초겔이 쓴 편지 유물이 있다. 파드마 삼바바는 죽기 전에 궁이나 동굴에 경전을 숨겨놓고 제자들의 마음 속에 경전을 숨겨놓았는데, 이들이 환생하여 명상을 통해 경전을 발굴한 사람들이 뙤르똥이다. 그 환생자들을 툴꾸라고 한다.

그 다음에 유명한 사람이 아티샤이다. 아티샤의 스승은 셋인데 비파사나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해서 인도네시아의 자바까지 찾아가게 된다. 자바의 수마트라에 있는 유명한 사원 보르모트는 불교로 융성했는데 지금도 찾아가보면 그 기운이 대단하다. 수마트라에 아티샤, 그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 스승을 찾아가서 배운 가르침이 아까 얘기했던 내 말과 비슷하다. “ 뭐가 들어오든 간에 자비로움을 내라”는 것. 그것을 배웠다. 그 스승이 바로 비말라끼르띠일거야. 당시 싱가폴에서 붓다로 일컬었던 사람이다. 인도로 돌아온 아티샤을 티벳의 왕이 초청한다. 초청한 티벳왕의 중생을 위한 마음에 감화받아 티벳에 건너가기로 결심했는데, 왕은 그를 만나기 전에 죽게 된다. 해서 티벳에 건너가 불법을 전하게 되는데, 중요한 그의 저작은 보리도동론이다. 오쇼 라즈니쉬가 이에 대해 강의한 책이 있다. 읽어보기 바란다. 마음공부야.

아티샤의 법맥은 카담파이다. 샤키파는 콘촉켈록이 창시했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 카큐파는 마하무드라의 전통으로 나로빠, 틸로빠, 마르빠, 밀라래빠로 이어지는 맥이다. 현재 카큐파는 여러 전통으로 갈라졌는데 수장은 카르마빠이다. 카르마빠는 지금 환생해서 현재22세이다. 이 사람은 달라이 라마보다 더 먼저 환생을 시작한 사람이다. 달라이 라마가 존경의 예를 갖추고 대한다. 상당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카큐파의 또다른 계열은 영국에 갔다 미국에 간 최캄 트롱빠이다. 그가 카큐파의 가르침을 서양에 전했다. 카큐파의 환생을 툴꾸라고 하고, 가르침을 펼치는 높은 스승들을 린포체라고 한다. 겔륙파는 쫑카파의 제자가 만들었는데, 쫑카파는 불교개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쫑카파 계열을 황모파(황색모자를 쓴다고 해서)라고 하는데, 황모파 수장 제 5대때, 달라이 라마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때 당시 원나라와 친해 서로 협정을 맺고 달라이 라마를 호칭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라를 통일해 신정정치를 하게되고 지금 그 법통이 내려오고 있다. 7대때는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현재 중국이 티벳지배의 근거를 여기에 두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한족들이 청을 뒤엎고 나라를 세운 다음 영국의 도움을 받아 티벳이 잠깐 독립을 했다가 1957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티벳이 침탈하게 된다. 그 때 13대 달라이 라마가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애썼으나 워낙 무장력이 없어 실패하게 된다. 14대 달라이 라마 때 강제로 합병되게 된다. 이때 티벳불교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워낙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불교문화는 어찌하지 못하고 나라의 통치권은 빼앗았지만 불교자체는 어찌하지 못했다. 주은래 등이 호의적으로 접근해 오는 듯 하자 중국공산당에 대해 호의적으로 만나다가 속은 것을 알고 다람살라로 탈출하여 평화와 자비의 사상을 설하면서 티벳의 불교와 정신을 전세계에 실천을 통해 전파하게 된다. 대승불교로서의 자비사상이 티벳불교의 가르침이다. 예수의 사상을 가장 잘 가르친 사람이 달라이 라마이다. 현재 사리투어를 주도하고 있는 라마 조빠 린포체가 달라이 라마와 친하다. 달라이 라마가 건넨 사리를 기본으로 사리투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붓다권이고 3천년 시대가 바로 마이트레야 시대이다. 티벳인들에게는 마이트레야가 티벳의 독립과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고 우리 나라도 미륵신앙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메시아 사상(우리 나라 자칭 메시야는 5천명)이 강한 나라이다. 현재 세계적 스승의 나라는 인도, 티벳, 한국이고 세속적인 주도세력은 중국과 유대인들이다. 티벳에서는 유대인과 연대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번 사리전을 이해해야 한다.

티벳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보리심이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깨달음을 추구한다. 모티베이션이 다르다. - 나와 일체중생이 다르지 않는 하나의 자리, 그 곳이 깨달음의 자리이다. 대표적으로 게셰 체카와의 말을 통해 보리심을 알 수 있다. 생각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는 수행을 하다 결국 보리심으로 깨침을 얻은 사람인데, 죽을 때 ‘나는 스스로 무간지옥에 태어나 그곳에 있는 중생들을 돕고자 염원했다. 허나 내 서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눈앞에 장엄한 정토가 펼쳐지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옥마저 품어버리기 때문에 지옥이 없는 것이다. 근데 아까 내가 얘기했던 수련방법이 티벳에서 말했던 로종수행이다. 로종수행은 모든 것을, 내게 어떤 것이 오더라도 내가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어떤 마음을 내주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와서 많은 것을 받았다. 이 세상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이제 내가 받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내어주고 갈것이냐 할 때 이 가르침의 뜻이 있다. 그게 바로 보리심이다. 이 보리심이 지극하면 깨침에 이를 수 있다. 이 가르침으로 문둥병 환자도 이 수련으로 고쳤다고 한다.

사리에서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닝마파의 수장인 두좀 린포체와 게셰 체카와, 쫑카파, 그리고 72종의 경전과 수련법을 마스터한 스승(달라이 라마까지 이 분을 스승으로 생각한다.)인 잠양 쵸기 로되(조기, 최기라 발음, 쓰기는 쵸키라고)와 역시 72종을 마스터한 두좀 린포체의 사리가 있다. 두좀 린포체가 환생했는데 그의 아들이 축구 영화를 만들었고 한국에도 다녀갔다. 이렇게 티벳의 생불로 모셔지는 분들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또 유명한 콘테르 사리가 있는데, 목건련과 쫑카파, 콘테르 사리가 우리가 친견할 때 방광을 했다. 이 정도면 티벳불교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피타오에서 가르치는 것들의 심층적인 부분은 바로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몸에 대한 것은 선도와 요가의 정기신(精氣神)이 가미되어 있고, 좀 부족한 것은 티벳쪽에서는 창조적인 즐거움이 좀 부족하다. 한국 사람들은 신명이 있어 티벳보다는 좀 더 역동적이다. 티벳은 끈기가 강하고 진득하다. 다람살라에 가보면 티벳인들에게서 오는 느낌이 우리 보다 훨씬 순도높은 한국사람이다는 느낌이다. 그 때 난민구제나 티벳의 독립을 위해 좀 도와주어야 한다는 서원이 일었는데 이게 인연이 돼서 사리전이 우리에게 온 것 같다. 우리가 가자 많은 티벳인들이 몰려왔다. 티벳의 전생적 기억으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줬는데 그들은 한국의 가르침으로 인식했다. 큰 역사적 흐름 속에 있고 찌라시 하나 돌리는 마음도 이와 맞물려 있다. 많은 이들이 즐거움으로 이런 기회에 동참하도록 하는 마음, 보리심으로 하자. 나의 마음의 성장을 타인들과 나누면서 더 큰 마음으로 나아가자고 하는데 우리의 의도가 있다. 이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 창조적이고 효율적으로 잘하는 사람들, 앞선 사람들이 빨리 잘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보리심이다. 이것은 나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될 것이다. 여기에 수행도 즐겁게 재밌게 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플러스 알파이다. 한국불교는 선가의 전통이지 대승불교라고 할 수 없다. 자비가 없이는 깨닫기 힘들다. 자비심, 사랑, 기쁨, 마이트레야 시대는 이런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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