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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말걸기

조회 수 3901 추천 수 0 2009.06.23 11:12:36
몸에게 말걸기-통증을 내려 놓아라. / 오쇼 라즈니쉬

오늘날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우리가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입증해 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웰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몸과 마음 사이에 놓인 깊은 교류감이다.

연구자들은 육체적인 질병의 절반가량이 스트레스에서 기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한 내용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플라시보 효과란 사람들이 특정한 의학적 치료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으로, 사탕 덩어리를 먹고 치료가 되는 사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우리는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건강상의 문제나 감정적인 어려움을 불평하게 될 때 특히 자주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부정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그 말이 맞아.’라고 무언의 동의를 하게 되는 말이다.
하지만 머리로“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고 믿는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쇼는 강의에서 종종 의식적 마음‘지식적으로 얻어진 이해’의 층은 너무나 얄팍해서 우리가 가진 능력의 10분지 1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큰 10분지 9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무의식의 마음과 교류하게 될 때, 그 힘은 더욱 강력해지게 된다는 뜻이다.

마음의 의식층과 무의식층 사이에 맺어진 관계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몸과 웰빙 전반에 끼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오쇼는 1989년에 가히 혁명적인 테크닉을 계발해냈다.
처음에 오쇼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이 방법을 직접 실행해보았다.

당시 그는 어깨에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 오쇼의 비서가 받아적은노트에 의하면, 오쇼가 그의 어깨에 대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쓰여 있다. “통증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말 그대로 어깨는 통증을 내려놓았다.
처음에 통증은 어깨에서 팔로 떨어져 내렸고, 다시 다리로 내려갔다.
하지만 오쇼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제자들을 불러모아서 몸에게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통증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움과 균형을 되찾는 이 실험적인 명상법을 함께 해나갔다.
이후 몇 주 안에“잊어버린 언어를 기억해내어 다시금 몸 그리고 마음과 대화를 나누기”과정이 탄생되었다.

이 과정은 현재 인도, 푸나에 있는 오쇼 명상 리조트에서 1시간씩 7일 동안 시리즈로 제공되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트레이닝 과정을 이수한 전문 세션기버(session-giver)들에 의해 개인세션 및 집단세션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심지어 몸을 적대시하기도 한다. 소위“문명화, 세련화”라는 명목 아래 부모와 교사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생기와 풍요로움, 감각과 자신의 몸에 대한 호기심 등을 억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른이 된 지금, 우리가 자라면서 들어온 금기와 교육을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교육의 감춰진 요소와 그것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는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과정 속에서 마술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즉,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무의식적인 태도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좀 더 새롭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

일단 이러한 새로운 태도가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는 몸에 대해 더 큰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다. 즉 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고, 몸이 여태까지 해온 기적적인 봉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몸에 맞서 싸우기보다 몸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추구해나간다.

육체적인 건강과 심리적 웰빙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몸과마음, 조화와 균형의 예술>은 의식적인 이해와 몸·마음 파트너 관계를 조력할 수 있는 실제적인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몸이 자연스러움과 균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캐롤니이만 -


지성적인 몸

서양의학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개체로 본다. 이러한 시각이 바로 서양의학이 저질러온 가장 큰 오류이다.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다. 자연과의 조화가 바로 건강의 비결이다. 서양의학은 인간을 기계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즉 기계적인 면모의 성공이 곧 인간 개인의 성공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고장 난 부분만 고친다고 해서 치료가 되는 기계가 아니다. 고장 난 부분, 아픈 부위는 단지 유기체 전체가 조만간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는 일종의 신호일 뿐이다. 아픈 부위는 다른 부분에 비해 그곳이 가장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픈 부위가 치료되고 나면 건강을 회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조만간 다른 부위가 고장을 일으키고 만다. 사실 우리는 치료를 통해서 오히려 아픈 부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막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치료로 인해 질병이 더 강화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의 몸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종합체가 아니라 단일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몸은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 한 부위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건강하다는 기계적인 시각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기체적인 단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몸은 언제나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몸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의견을 나눌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몸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여태까지 몸을 이용해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몸에게 고마움을 표시해본 적이 없다.
몸이 충실한 하인의 노릇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지적인 하인의 노릇을 자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몸이 우리보다 더 지성적이라는 사실을 자연은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 갖춘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호흡이나 심장 박동 혹은 혈액순환이나 음식물의 소화 등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에게 주어졌다. 만일 그대가 심장의 박동이나 혈액의 순환을 직접 해야 한다면, 그대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게 뻔하다.

만일 자연이 그대에게 호흡을 맡겼더라면, 죽음이 단박에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게 뻔하다. 무슨 수로 살 수 있겠는가?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채 순식간에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될 텐데 말이다. 혹은 다른 사람과 싸우느라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단 한 순간도 호흡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그대는 소화기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지 아는가? 끊임없이 음식물을 삼키고 있는 그대, 소화를 하고 있는 것이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2차 대전 중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
총알이 한 남자의 목을 관통했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목구멍을 통해서 음식물을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다. 소화기 전체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의사는 위장 한 쪽에 구멍을 뚫어 관을 연결한 뒤 그 관을 통해 음식물을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허기는 면했지만 그는 더 이상 음식의 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투입할 때조차 전혀 단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 너무 화가 났다.
“이런 세상에,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잖아.”
그러자 의사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한 번 해보십시오. 일단 맛을 본 다음, 그것을 관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이후 남자는 40년간,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맛을 음미한 다음, 그것을 관에다 집어넣는 일을 계속했다. 관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어차피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도 관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가엾은 남자의 것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반면, 우리의 그것은 피부 속에 가려져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실 그의 관이 우리의 소화기관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그의 것은 언제든 사용하고 나서 깨끗하게 청소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소화기관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자파티 한 장을 피로 만들기 위해서 그야말로 거대한 공장이 필요할 것이라고.

음식을 영양소별로 분리한 다음 각 영양소를 특정한 부위로 보내는 일. 뇌로 보내야 할 영양소는 혈관을 따라 뇌로 운반하고, 눈으로 가야 할 영양소는 눈으로, 귀로 가야 할 영양소는 귀로, 뼈로, 피부로 등 소화기관은 이 복잡한 작업을 70년, 80년, 90년씩 계속 해오고 있다.
이것만 봐도 이 작은 소화기관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소화기관은 그야말로 매순간 기적을 창출해내고 있는 셈이다. 오직 그대만이 기적의 몸, 몸이 가진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지혜로운 몸

연금술사는 금속을 금으로 변형시키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몸은 연금술사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다. 몸은 우리가 먹어치우는 온갖 종류의 잡스러운 것들을 피로, 뼈로 변형시킨다.
심지어 그 잡스러운 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뇌를 만들어내기 까지 한다. 우리가 쉴 새 없이 먹어대는 아이스크림, 코카콜라를 가지고 몸은 쉴 새 없이 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뇌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만들어내고, 붓다, 짜라투스트라와 노자를 만들어낸다. 기적이 따로 없다.

뇌, 축구공보다 작은 이 뇌 하나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는 도서관이 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뇌의 용량은 무제한적이다.
뇌는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억의 창고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은 용량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려고 할 경우, 그만한 지식을 담기 위해 최소한 몇 마일의 공간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과학이 급진전을 거듭했다고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피로 변형시키는 방법조차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피로 변형시킬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이스크림에서 뇌를 만들어낸다니,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의 뇌는 과학조차 따라잡지 못할 일을 해오고 있다. 설사 과학이 아이스크림에서 뇌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국 뇌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뇌가 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뇌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몸과의 대화

일단 몸과의 대화를 시작해보면, 여러 면에서 편해진다.
우선 몸과 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강요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단지 몸을 설득하면 된다. 몸과 벌이는 갈등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상관없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더 많은 긴장을 만들어낸다.

몸과의 관계에서 갈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함이 관계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 몸은 신이 우리에게 준 아름다운 선물이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몸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곧 신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몸은 신이 부여한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절정 한가운데에 있다.

몸은 신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신전을 가꾸고 돌보아야만 할 일이다. 우리에게는 신전을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부터 7일간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과의 대화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직접 시도해보라. 사실 기적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나의 손은 말을 따라서 움직인다. 나는 지금 그대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대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마음이지만, 그 정보를 표현해 주는 것은 몸이다.

손을 들어 올리고 싶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손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손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만 하면 몸이 알아서 행위를 취한다. 기적 같은 일이다. 사실상 생물학이나 물리학조차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단지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올리고 싶다. 이것은 생각이다. 어떻게 이 생각이 물리적인 메시지로 변형을 일으켜 손에게 전달되는 것일까? 찰나에 불과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말이다. 겨우 눈을 한 번 깜빡거릴 정도의 짧은 시간,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나의 손은 계속해서 동시적인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나의 생각이 언어화 되는 것과 동시에 몸은 그것을 동작화 시킨다는 뜻이다. 말과 손짓 사이에 간격은 전혀 없다. 말과 손짓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마치 몸이 마음과 나란히 평행선을 이루며 함께 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게 말을 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몸과의 대화, 여러 면에서 편해진다.


몸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주기

몸을 따르도록 하라.

절대로 몸을 지배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몸은 우리가 뿌리를 내린 토대이다.
몸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99퍼센트의 불행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대, 몸에게 귀를 기울여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몸은 이렇게 말한다.
“멈춰! 그 음식을 먹으면 안 돼!”
하지만 그대는 쉬지 않고 먹는다. 몸의 소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음은 어떤가?
“맛있는데, 정말 맛있어! 조금만 더 먹자!”

그대는 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몸은 토할 것 같다. 위장이한다.
“그만! 이제 그만 먹어. 나는 너무 힘들어.”

그러나 마음은 뭐라고 말하는가?
“이 음식을 먹어봐, 맛있지? 조금만 더 먹어.”

그대는 마음의 소리에만 신경을 쓴다. 몸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99퍼센트의 문제가 사라져버릴 텐데 오직 마음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머지 1퍼센트는 고질적인 문제라기보다 일시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몸과의 교류를 차단당했다. 최대한 몸에게 무관심하도록 교육받았다.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는 지금 배가 고프다. 엄마는 시계를 쳐다본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3시간 후에 아이에게 우유를 줄 수 있다. 엄마는 시계만 쳐다본다.

엄마가 쳐다보아야 할 시계는 바로 아이다. 아이는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챈다. 그리고 아이는 지금 당장 먹을 게 필요하다. 아이가 지금 당장 먹을 것을 얻지 못한다면, 몸과의 교류를 차단당하게 된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우유를 주는 대신, 엄마는 아이에게 가짜 젖꼭지를 물린다. 플라스틱 조각으로 아이를 속이려든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음식 대신, 플라스틱 젖꼭지로 아이의 허기를 채우려 드는 엄마. 몸에 대한 아이의 감각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자 하는 그 의도로 인하여 아이는 결국 몸과의 교류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혜로운 몸의 소리는 무시당한 채, 마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는 가짜 젖꼭지를 입에 문 채 잠이 든다. 이제 시계가 3시간이 지났음을 알리고, 엄마가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야 할 시간이다. 지금 아이는 잠을 자고 있다. 아이의 몸은 잠을 자고 있다. 엄마는 자는 아이를 깨운다. 왜냐하면 의사가 3시간 후에 우유를 먹여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엄마는 또다시 아이의 생체리듬을 파괴하려든다.

그런 식으로, 점차적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몸과의 교류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몸이 먹을 것을 원하는지 아닌지, 몸이 섹스를 원하는지 아닌지 몸이 피곤한지 어떤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될 따름이다.


웰빙을 위한 기본 조건

몸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몸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몸이 말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라. 몸이 가진 지혜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 보라. 마음이 하는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몸의 지혜에 그대 자신을 맡겨보라. 나는 그대에게 미이라 처럼 굳어있는 법칙 따위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깨어있는 의식이란 어떤 것인지, 그 맛을 느껴 보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대는 단지 몸에게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몸은 우리의 친구이다. 몸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보라. 그 언어를 해독해 보면 점차로 몸의 세계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몸이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삶이 가진 모든 신비에 대해 알게 된다.

농축된 에센스의 형태로 우리 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신비. 빗장이 풀리기만 하면 수 백 만 배로 커지는 신비. 온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인 신비. 하지만 몸의 언어를 해독하기 전까지 그것은 농축된 채로 우리의 몸 안에, 우리의 현존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몸에게 말을 걸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움직이기는 하나 몸과 제대로 된 교류를 맺지 못하고 있다.
교류란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몸이 아플 때,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전혀 몸을 느끼지도 못한다.

두통에 시달릴 때 머리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두통이라는 도구가 없다면 머리와의 교류가 일어나지도 않는다. 다리가 아프다. 이때 비로소 다리를 인식하게 된다. 몸에 이상한 증상이 일어날 때만 우리는 몸을 느끼고 인식한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몸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한 우리, 사실 만사가 형통한 그 순간이 바로 진정한 교류를 할 수 있는 때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일어나는 교류는 질병이 다리 역할을 하게 되고 사실 그 순간, 웰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통이 생겨야 일어나는 교류는 머리와의 그것이 아니라 두통과의 교류일 뿐이다. 머리와의 교류는 두통이 없을 때 비로소 맺어질 수 있다. 그러면 머리는 웰빙으로 가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만사가 형통할 때는 전혀 교류가 일어나지 않고 교류를 위한 능력조차 상실해 버렸다. 교류란 겨우 응급 시에 사용되는 구급약에 불과하다. 두통에 시달린다. 당장 머리를 수선할 만한 약이 필요하다. 당장 응급처치를 해야만 한다. 서둘러 교류를 시작하는 그대, 두통에 시달리는 머리를 수선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만사가 화평할 때 몸과의 교류를 맺어야 한다. 잔디밭에 누워서 두 눈을 감고, 외부에서 시작되어 내면으로 옮겨가고 있는 센세이션을 느껴본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웰빙을 느껴본다. 혹은 강변에 누워서 몸에 와 닿은 물살을 느껴본다. 모든 세포가 물에 씻겨 차가워지는 것 같다. 물의 시원함이 살갗에서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세포에서 세포로 시원함이 번져가더니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몸은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놀라운 기적이다.

햇볕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본다. 햇살이 몸을 통과해 나간다. 그 온기가 피부를 통해 내면으로 옮겨간다. 햇살이 세포에 닿는가 싶더니 마침내 뼈에 가닿는다. 태양은 생명이자 또한 생명의 근원이다.

눈을 감은 채, 몸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느껴보라. 여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단지 지켜보고 그저 즐기면 된다. 차츰 우리는 아주 예민한 센세이션은 물론 몸과 맺어진 조화로움조차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마치 아름다운 음악이 쉬지 않고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비로소 몸과의 진정한 교류가 시작된다.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그대는 단지 죽어있는 몸을 끌고 다니게 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차를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차와 맺은 교류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차에 애착이 없는 사람도 물론 차를 운전하겠지만 차를 단순한 기계 정도로 취급할 게 뻔하다. 하지만 차에 대한 애착이 있는 사람은 차에게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변화조차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엔진 소리의 변화조차 읽을 수 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거나 듣지 못하는 소리조차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다. 차에 함께 동승한 사람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소리의 차이점을 그는 금방 구별해낸다. 엔진 소리의 사소한 차이, 딸깍거리는 소리 등 자신의 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모든 변화를 금방 눈치 채게 마련이다. 그는 차와 깊은 교류를 맺고 있다. 그에게 차는 기계 덩어리가 아니다. 그에게 차는 몸의 일부분과 같다. 그는 차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을 한 사람이다.

몸을 단순한 기계로 취급할 수도 있다. 단순한 기계를 대하는데 굳이 극도로 예민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하겠지만, 몸과 아무런 교류도 없는 탓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몸과 관련해서 몇 십 년간 연구를 해온 끝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 결론은 이렇다. 질병이 발생하기 전, 약 6개월간 몸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6개월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1975년에 질병에 걸린다고 하면 이미 1974년 중순부터 몸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대는 어떤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몸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결국 질병에 걸리고 난 다음에 겨우 알아차리게 된다. 혹은 질병이 발생한 후에도 의사가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알려주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채지도 못한다.

이 분야에 관해 수 년 간 연구를 해오던 사람이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예견을 할 수 있는 필름과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환자가 질병의 여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치유가 가능하다. 즉 내년에 암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견한 지금 미리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는 말이다. 육체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없으나 몸 안에서 일종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생체에너지 상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일단 생체에너지 상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나면 그것이 육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생체에너지 상에서 치료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육체가 그 질병에 걸릴 확률은 없어진다. 이 연구는 다음 세기가 되면 질병에 걸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보고한다. 질병이 몸에 실제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일종의 기계 장치가 질병을 예견해준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질병을 예견할 수 있다. 오직 그대만이 예견할 수가 없다. 몸에 거주한 채 살고 있지만 아무런 교류가 없기 때문에 몸이 알려주는 정보를 하나도 읽을 수가 없다.

힌두교 산야신들이나 리쉬들(영적인 감흥에 의해 시를 쓰는 인도의 시인들이나 성인들), 선사(禪師)들, 불교의 비구들은 미리 죽음을 선포하는 경우가 많다. 놀라운 사실은 대개 그들이 죽음에 도달하기 6개월 전에 죽음을 선포를 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6개월 전에 그들은 한결 같이 죽음을 선포한다.

6개월이라는 기간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6개월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육체가 죽기 6개월 전부터 이미 생체에너지가 죽어가기 시작한다. 생체에너지와 깊은 교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에너지가 점차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리고 6개월 이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선사들은 심지어 죽음의 형태를 선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의 죽음을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형태조차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선사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떤 자세로,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지 나에게 제안을 해다오.”
그 선사는 약간 미친 노인이었다. 물론 아주 아름다운 광인(狂人)이었다.
선사의 제안에 제자들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들은 스승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승은 언제나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이번에도 역시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자 중의 한 명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사원의 구석에서 선 채로 돌아가시면 어떨까요?”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 이미 한 승려가 서서 죽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서서죽는 것은 별로 좋을 것 같지가 않군. 좀 색다른 것을 제안해보라.”

그러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정원을 거닐다가 죽는 것은 어떨까요?”
“내가 듣기로 중국에서 누가 이미 걷다가 죽었다던데…”
스승이 대답했다.
그때 제자 중의 한 명이 아주 색다른 제안을 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거꾸로 선 채로 죽는 것은 어떻습니까?”

머리를 바닥에 대고 거꾸로 선 채 죽은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다. 거꾸로 서서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꾸로 서서 잠을 자는 것도 어려운데 죽기까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음은 위대한 수면 상태나 마찬가지다.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그냥 서서 잠을 자기도 힘든데 거꾸로 선 채로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좋은 생각이야.”

제자들은 스승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사는 이미 머리를 바닥에 댄 채 거꾸로 서있었다!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스승님이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나? 제자들은 스승이 이미 선 채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죽은 사람이 거꾸로 서있다니.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사원 근처에 스승님의 누님이 비구니로 살고 있다고 했지. 가서 그분을 모셔오자고. 그분이라면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그분은 자신의 동생에 대해 잘 알고 계실 테니 말이야.”

얼마 후, 선사의 누님이 도착했다. 거꾸로 선 채 죽어 있는 선사를 보자마자 비구니가 소리를 질렀다.

“이큐”, 이큐는 선사의 이름이었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라. 제대로 된 방법으로 죽어야지.”
그러자 이큐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일어났다.
“좋아요. 나에게 제대로 된 방법이 뭔지 알려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파드마사나(padmasana), 즉 붓다의 자세로 앉아서 죽도록 해라. 거꾸로 서서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돼. 너는 평생을 바보처럼 살아오더니,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서서 죽는다면 죽은 다음에 조차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거야.”
그래서 이큐는 붓다의 자세로 앉아서 죽었다고 한다. 이큐,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자세까지 선택하다니. 자신의 생체에너지가 수축되기 시작하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이란 우리가 몸과 표면적으로 교류할 때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그 뿌리와 교류할 때만 가능해진다.

몸은 우리의 친구이다
모든 종교는 우리에게 자연에 저항하라고 가르쳐왔다. 자연스러운 것은 무엇이나 비난의 대상이었다. 종교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잘 다룰 수 있을 때, 생물학이나 생체학, 심리학이라는 감옥 혹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만일 우리가 몸과, 마음과, 가슴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게 되면, 결코 나 자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내가 모든 종교에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는 독으로 가득한 씨앗을 우리의 존재 안에 심어왔다. 즉 우리가 몸 안에 거주하고 있기는 하나 몸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씨앗 말이다.

몸은 70년, 80년, 90년 심지어 100년 동안이나 우리에게 봉사를 아끼지 않는다. 과학은 몸과 비교해서 더 나은 메카니즘을 발명해내지 못했다. 발명해낼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몸이 가진 복잡한 구조를 흉내조차 낼 수 없다. 하물며 몸이 우리를 위해 매일매일 이루어내고 있는 기적이라니… 그런데 우리는 몸에게‘고맙다’는 말조차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몸을 적으로 대해왔다.

몸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친구이다. 몸은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봉사를 하고 있다. 우리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상관없이 봉사는 계속된다.

우리가 잠에 빠져있을 때조차 몸의 봉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조차 몸은 쉬지 않고 우리를 보호해준다. 뇌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낸다.

그대가 잠을 자고 있다고 하자. 거미 한 마리가 다리 위를 기어 다닌다. 이때 다리는 그대가 신경 쓸 틈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거미를 떨쳐내 버린다. 마치 다리에 따로 뇌가 달려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소한 일은 굳이 중앙의 통제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 굳이 뇌에 전달이 되지 않아도 다리가 알아서 일을 처리한다.

혹은 모기 한 마리가 손등을 문다고 하자. 손이 저절로 모기를 쫓아버리거나 없애버린다.
그대의 잠은 방해받지 않은 채 손이 알아서 모든 것을 처리해버린다. 물론 손에는 뇌가 없다. 하지만 손은 작은 뇌라고 불릴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몸에 있는 수백만 개의 세포는 수백만 개의 뇌를 가지고 쉴 새 없이 우리의 몸을 돌보고 있다.

사람들은 몸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고려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온갖 종류의 음식물을 삼킨다. 몸에게 지금 먹고 있는 음식물이 소화를 시키기에 어려운지 어떤지 묻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음식물을 삼키기에 바쁘다. 다행히 우리 몸의 소화를 담당하는 기관은 거의 한 세기 내내 휴일도 없이 소화를 해내고 있다. 한 기관에 고장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다른 기관으로 대체하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몸, 스스로의 지혜에 의존해서 낡고 고장 난 기관을 대체할 새로운 기관을 끊임없이 창조해낸다. 여기서 우리가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와 전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몸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내고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지만 종교는 끊임없이“몸을 거부해야만 한다. 흐름에 역행해서 가야 한다. 몸에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몸이 뭐라고 말을 하든, 항상 그 반대로 행동하라.”고 가르친다.

자이나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몸은 지금 허기져 있다. 몸이 허기지도록 내버려두라.
몸을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둬라. 몸은 굶주릴 필요가 있다.”

몸이 우리에게 봉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월급을 받거나 편의를 제공받는 것도 아닌데, 자이나교도들은 철저하게 몸에 저항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몸이 잠에 빠지려고 하거든, 깨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라고 가르친다.

“몸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에고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몸이 음식을 원하거든 ‘안돼!’하고 말하라. ‘안돼!’라는 말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바로 주인이다. 주인은 몸을 노예처럼 부려야 한다. 더 심하게 몸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위협하라. 몸에게‘내가 하겠다고 작심을 하면, 너는 군말 없이 따라야만 해.’라는 말을 주지시켜야 한다.”
몸에 맞서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몸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몸은 우리의 친구이다. 몸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몸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몸은 모든 면에서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호흡을 통해 공기와 교감한다. 우리는 햇빛과 교감한다. 우리는 꽃향기와 교감하고, 달빛과도 교감한다. 자연의 모든 요소와 우리는 하나로 교감을 하고 있다. 우리는 홀로 떨어진 외로운 섬이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대륙의 일부분이자 동시에 개체성을 띠고 있다. 내가 기적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를 알겠는가?

우리는 존재계의 한 부분이면서 개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존재계는 기적을 창출해냈다. 전체의 일부분이면서 개체성을 잃지 않는 것,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몸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자연과 존재계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결에 역행하기보다 함께 흘러가야 한다. 렛고우. 강물이 그대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두 팔을 벌리고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그 어떤 이름으로도 강물을 역행하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경전에 입각하여 혹은 신성한 사상에 입각하여 우리가 자연과 맺은 조화를 파괴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조화보다 값진 것은 없다. 삶을 존중하고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삶, 그것보다 더 신성한 것이 어디 있는가? 삶, 그것보다 더 성스러운 것은 없다. 삶은 대단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소위 종교적인 바보들은“대단한 일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만,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적인 바보들의 전략은 간단하다. “큰일을 해야만 한다. 대단한 일을 하도록 노력하라.”이러한 전략은 에고를 만족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에고는 성직자들의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와 사원, 신전들은 성직자들의 하수인을 고용하고 있다. 즉, 에고라는 하수인. 대단한 일을 하라, 큰일을 하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단한 일, 큰 일 따위는 없다.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가 소위 말하는 대단한 일을 하는데 열중해 있다면, 그대는 가장 중요한 삶,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차(茶)를 마시는 일, 이것이 삶이다. 친구들과 떠는 수다, 이른 아침에 나서는 산책길이 바로 삶이다. 특별한 곳이 아니더라도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목적지이다. 어느 자리에서 되돌아서도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몸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바로 삶이다. 옷을 빨고, 바닥을 닦고, 정원에 물을 주고. 이 모든 사소한 행위들이 바로 삶이다.

낯선 사람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는 것이 삶이다.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낯선 사람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가벼운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꽃에게도 인사를 할 수 있다. 물론 나무에게도. 새와 더불어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새들은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부르지만 우리는 한 번도 관심을 주어본 적이 없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 차례다. 작고 사소한 행위들,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

그대에게 주어진 삶을 존중하라. 자기 자신을 존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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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남들로 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했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쇼는 사가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자발푸르 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로 지냈으며 그 사이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전통적인 신념에 의문을 던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또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현대인의 신념 체계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쇼는 특유의『다이내믹 명상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 1월 1 9일에 자신의 몸을 떠났다. 푸나에 있는 그의 대규모 공동체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다.




출처 ; http://www.suwonyoga.co.kr/

출처 :심신치유 원문보기  글쓴이 : 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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