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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세계를 공부하려면 법칙, 원리, 곧 법의 세계를 정확히 꿰뚫어야합니다.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깨달음을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아는 사람은 깨달음을 알게 되며, 연기를 보는 것이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며, 연기를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은 법의 세계를 꿰뚫게 된다고 했습니다. 연기는 사물의 근본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자 만물의 작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연기는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이기도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기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 고 했으며, 도교나 철학에서는 원래 세상은 그냥 있었다.’라고 주장하며, 진화론자들은 세상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구조 성장 진화했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연기설로 만물의 존재방식을 설명했습니다. ‘A는 그냥 A가 아니라 B와 연관되어서 존재한다. 그러기에 A가 있으므로 B가 있으며, A가 사라지면 B도 사라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라는 한자를 보면 한쪽이 다른 쪽에 기대어 있듯이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앎이 연기법입니다. 과거 고전물리학에서는 만물의 본질을 원자라고 보았습니다. 만물의 근본은 작게 쪼개어 나가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양자물리학은 그런 이론들을 모두 깨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 인도의 힌두 사상에서는 인간을 아트만이라는 불변하는 개체적 영혼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힌두교의 근본 이론을 깨어버렸습니다. 부처님은 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관된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존재형태 또한 어떤 개체적 실체가 있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은 학생이 있어서 존재하고 학생은 선생이 있음으로서 학생이 됩니다. 선생이 사라지면 학생도 사라집니다. 남녀도 같습니다. 남자는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없어지면 여자도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 맺고 연기되어 있습니다. 연기의 뜻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물의 본성인 연기를 깨닫고 이것을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데 적용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2단계로 만든 12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에 대해 연기법을 적용하여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하면 사라지는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은 오늘날 종교적 사상적 이론으로도 중요하지만 사물을 탐구하는 정교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2연기법을 통해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비추어 보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과 지구가 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단순히 그냥 밥 먹고 사는 데에는 어떤 이론을 가지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쏠 수 없으며 물리적 현상에 대한 도움을 받기 힘들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면 우리는 무지 속에서 자기만의 틀과 기준에 빠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왜곡하게 됩니다.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학생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언제나 학생은 아니듯이 선생이라고 어딜 가든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과의 관계성을 벗어나면 학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닙니다. 집에 오면 누군가의 남편, 아내, , 아들 등 다른 존재가 되는데 자신을 하나의 고정된 역할인 선생을 계속 주장한다면 관계는 왜곡될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주장이 고통을 만듭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지닌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은 왜 일어나며 일어난 고통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12연기적으로 풀이하셨는지 알아봅시다.

 

 

<12연기(緣起)>

 

무명(無明) () () 명색(名色) 육입(六入) () () () () () () 노사(老死)

 

 

1. 노사(老死)

 

노사는 고통의 다른 말입니다. 늙고 죽고 병들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고.. 인간이 삶을 살면서 느끼는 모든 고통의 다른 이름이 노사입니다. 인간의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부처님의 연기설에 따르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앞의 이것이 없어지면 뒤에 저것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겁니다. 자신에게 어떤 고통이 일어났다면 이 고통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명상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를 깨달았습니다. 사물이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말은 각각의 개체로서는 무엇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입니다.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대적인 관계성을 통해 서로서로 변해갑니다. 수행단체에서는 회원이고, 직장에서는 과장이며, 집에서는 아빠이거나 아들이고, 다른 곳에 가면 또 바뀌고... 우리는 관계 맺는 모든 상황과 조건에 따라 계속 바뀝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는 존재의 속성을 우리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물에도 그것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데도 우리는 에 대한 실체를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고통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법 안에서 존재의 실상이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괴로움(A)은 무엇(B)으로 인하여 생겼을까요?

 

 

2. ()

 

()이란 무언가가 충분히 꽃이 필 만큼 자랐다는 뜻입니다. 고통이 외부로 발현되기 전에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를 생()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예로 든다면 노사라는 고통의 열매가 맺히거나 꽃이 피어난 것은 나무가 충분히 자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고통이 내면에서 자라나서 밖으로 발현될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어떻게 해서 자라나게 되었을까요?

3. ()

 

()씨앗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은 씨앗이 있었기에 싹이 트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다른 말로 씨앗은 업식을 말합니다. 12연기의 지혜는 고통을 만드는 업식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반복확장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의 무명(無名), (), ()은 과거 업식에 해당되고 생과 노사는 미래의 업식입니다. 나머지 명색(名色)~()는 현재의 업식입니다. 이런 업식의 작용을 정확히 알아야합니다. 업식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계속 업식을 확대 재생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씨앗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4. ()

 

무언가를 취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행위를 했다는 뜻입니다. 행위에는 생각, , 행동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한 그것들이 씨앗을 만들었습니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결국 괴로움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요?

 

 

5. ()

 

()는 우리가 이미 지닌 호불호가 만든 욕구의 내적갈망입니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나 이거 싫어.... 하면서 호불호의 생각을 계속 굴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불호)를 계속 갈망하는 내면의 갈증입니다. ‘는 호불호의 생각이 행위로 발현된 것이라면 는 행위로 발현되어 나오기 전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욕망을 품고서 할까 말까갈등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말로 튀어나오든 행동으로 튀어나오든 외부로 드러나는 단계가 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호불호의 갈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6. ()

()는 우리 안의 호불호가 일으키는 순간의 감각을 말합니다. ()에는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감각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외부의 어떤 대상을 보든지, 듣든지, 냄새 맡든지, 맛보든지, 또는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순간적으로 좋다!’가 일어나거나 싫다가 일어납니다. 불꽃과 같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감각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것은 새로운 호불호의 씨앗이 됩니다. 좋고 싫음의 이런 감각은 왜 일어날까요?

 

 

7. ()

 

()은 이것과 저것의 만남과 접촉을 말합니다. 어떤 대상과 접촉하게 되면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순간을 말하고, 귀가 소리를 듣는 순간을 말하며, 피부가 대상을 만지는 순간과 코가 냄새 맡는 그 순간을 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촉은 왜 일어날까요?

 

 

8. 육입(六入)

 

()은 우리 안의 감각기관이 있어서 생겨납니다. , , , , 피부, 머리를 육근(여섯 개의 뿌리)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육근에 끌려 다니기 쉬우며 그래서 6근을 우리의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도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육입은 왜 일어날까요?

 

 

9. 명색(名色)

 

명색은 모든 사물의 모양과 이름을 말합니다. 6근으로 인식되는 외부의 경계를 말합니다. 좋거나 싫은 게 있으면 감각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쏠려갑니다. 바깥의 모든 경계들을 명색이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물에는 왜 명색이 있을까요?

 

 

10. ()

 

식은 의식을 말합니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때의 식은 과거의 경험이 만든 업()의 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11. ()

 

행은 과거에 했던 여러 가지 생각이나 말, 행동의 결과입니다. 행으로 인해 식이 만들어지고, 식이 명색을 보고, 명색이 육입과 만나서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은 갈애가 되어 또 다시 하고 싶어지거나 싫어하는 취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씨앗이 되어 점점 생하여 노사라는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행위는 왜 일어났을까요?

 

 

12. 무명(無明)

 

무명은 무지 또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모든 고통은 처음에 무지해서 일어납니다. 몰라서.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결론을 말한다면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하늘의 벌이나 죄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무지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복하려면 자신의 무지에서 벗어나서 지혜로워져야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올바르게 아는 지혜를 반야(般若)라 합니다.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고, 행이 없으면 식이 없고, 식이 없으면 명색이 없고, 육입도 촉도... 다 없어집니다. 이처럼 사라지는 원리로 대입을 해보거나 일어나는 원리로 12연기를 대입해보아도 좋습니다. 이때 무명, , 식은 과거에 만들어진 업식입니다. 이런 과거의 업식이 감각(6)을 통해 대상을 봅니다.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듣는 촉을 작용이라고 합니다. 작용은 만나는 과정과정을 말합니다. 눈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 무언가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이때 일어나는 순간적인 싫고 좋음(호불호)이 수입니다.

 

수는 알아차림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과연 수의 단계에서 사물의 작용하는 이치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남방의 소승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관()을 통해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수행합니다. 관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걸을 때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올라오는 감정, 생각을 계속 지켜봅니다. 취를 하면 새로운 업식의 씨앗이 생겨나니까 취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계정혜(戒定慧)에 대한 수행의 원리가 12연기에서 나옵니다. 계율은 왜 필요할까요? 미래의 씨앗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업식을 미래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율을 정해 새로운 행위를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 예를 들어볼까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하는데 여러분 안에서는 과거의 업식이 발목을 잡습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지만 과거의 업식이 머릿속에서 속삭입니다. ! 이불 밖은 추워~(), 싫어~(), 일어나기 싫다~(), 더 자자~()하며 업식을 키우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애, 취 단계에서 자기만의 계율과 규칙을 적용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의 업식대로 행동하지 않게 되어 새로운 업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계율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면 촉, , , 취에 끌려가서 업식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업식은 머릿속의 속삭임입니다. 머릿속에서 오늘은 일어나기 싫어, 쉬고 싶어, 그냥 자자라는 끊임없이 속삭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업식의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업식의 소리와 동일시가 되어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나인 줄 알고 업식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업식으로 미래의 업식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업식에 대해 정확하게 느끼고 보고 알아차리는건 수의 단계입니다. 눈이 보는 순간 탁귀가 소리를 듣는 순간, 이것과 저것이 만나는 순간 탁!, 불꽃이 일어납니다. 불꽃이 튀는 순간 싫고 좋음의 순간적인 느낌이 일어납니다. 거부감, 저항감, 수용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때 알아차리게 되면 애, 취로 더 이상 진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업식을 더 키우게 됩니다.

 

수의 단계에서 업식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관()입니다. 관법은 수단계의 수행입니다. 자신의 미세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식의 단계에서 머릿속의 속삭임을 고용하게 만드는 것이 멈춤()입니다. 지관(止觀)쌍수 수행이 여기서 나옵니다. 머릿속의 움직임 자체를 모두 쉽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혜()는 무엇일까요? 혜는 무명이 만들어내는 12연기의 전체구조를 꿰뚫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 식인 과거의 업식은 어리석음인 무명(무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무지로 인해 괴로움이 반복됩니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지의 어둠에 지혜의 빛을 비추어야합니다. 무지의 업식에서 벗어나서 삶을 있는 그대로 무아와 무상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혜입니다. 알아차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업식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계율도 지키지 않고 가만히 자기를 던져두면 업식이 점점 커져서 삶은 괴로움이 됩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서는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관계되어 존재합니다. 지혜로움으로 업식의 목소리를 따라가지 않는 지켜보는 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모든 걸 보고 듣고 있습니다. 12연기의 법칙을 생활에서 적용하고 그 법칙대로 자신의 업식을 비추어봅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던 정확한 법clr과 원리를 깨달아야합니다. 12연기의 원리를 정확하게 깨닫게 되면 얽힌 인연의 고리는 쉽게 풀릴 것이며, 업식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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