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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수행의 길....

조회 수 976 추천 수 0 2016.11.28 09:21:59

수행을 하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요? 저는 어릴 때 가정환경이 어렵다보니 편안함과 안정감을 찾고자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순간 인생의 목표가 깨달음이 되었어요. 많은 책들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깨달으면 모든 인생의 고통이 한방에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선생들을 찾아다녔으며, 30대까지는 이런저런 수련법들도 많이 해었지요. 때로는 수행단체에 드러가서 가르치는 선생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끝까지 해보기도했어요. 하지만 몇몇 소중한 체험들이 있었지만 내마음의 고통은 언제나 똑 같았지요.



그러다가 40대를 지나며 마지막으로 한 선생을 만나 마음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멈춰지는 경험을 했었지요. 그때 선생으로부터 깨달았다는 인정의 말도 들었지만 그것은 전혀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시중에 깨달았다는 사람들을 다시금 찾아서 만나보기도 했지만 내안에 언제나 흔들리는 뭔가가 항상 있었지요. 그러면서 나는 가르치는 선생은 내가 알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아닐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됐지요.



그러면서 우연히 심리를 만나게 되었어요. 심리를 만나면서 이때까지 내가 해왔던 것은 어떤 면에선 진실한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추구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수행법을 통해 나는 무언가 되려고 했고, 무언가 이루려고 했고, 부족함을 극복하려고 했지 진짜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외면하고 있었지요.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내면으로 회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결국 마음공부라는 것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었는데 나는 나를 알기보다 무언가를 해서 어떤 상태가 되면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착각했었지요. 뭔가를 추구하는 출발부터 오류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것이 오류임을 나에게 바르게 알려주는 선생이 없었어요. 그때부터 내 자신에 대해서 다시금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심리 책을 보면서 내가 어릴 때 어땠는가, 내안에 무엇이 있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저런 감정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부모와 나는 어땠는가, 주변사람과 나는 지금 어떤 관계 속에 있고, 나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으며, 왜 나는 등등... 이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계속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비로소 나에게로 돌아오는 공부의 시작이었어요.



과거에 비록 여러 수행을 했지만 사실 그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는 수행을 한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그러한 에고의 욕심에서 마음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그 후에 내 안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내 안에 있는 부족한 어떤 것들이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이걸 알게 되면서 나는 심리프로그램인 아이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어요.



'내 안에 일어나는 어떤 것도 아무 문제가 없구나. 내가 어떤 감정을 내더라도 그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그냥 이것이 나구나'를 알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많은 감정과 내가 외면하고 안 보려고 했던 여러 부끄러웠던 경험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래, 괜찮다. 이게 나다.'라고 받아드렸지요. 내 안에 인정받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것을  더이상 부정하지 않고 ', 저 인정받고 싶어요' 하면서 내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이런 받아들임이 자연스럽게 되니까 그 동안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긴장했던 몸과 마음에 조금씩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지요. 힘이 빠지면서 나는 이런 나가 될 수도 있고, 저런 나가 될 수도 있는... 이렇게 해도 괜찮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상태로 들어갔지요.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 나라는 것이 없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고정되어 있는 나라는 게 없구나, 그렇다면 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개념이고 환상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에요.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것은 다 하나의 의식이고 다 하나의 마음이었지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 생각들을 붙잡을 때 고통이 일어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지요. 결국 수행과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은 저 바깥에서 무언가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잘 아는 것이었지요.



'진짜 나는 무엇인가, 진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얼 나라고 하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 탐구 하다 보면 내가 경험했듯이 '나 라는 게 없다(무아)'는 부처님의 그 말씀, 깨달음이란 어디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무언가 노력해서 얻는 것도 아닌 원래 그러한 것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의식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원래 우리는 그냥 깨달아 있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됩니다.




진짜 편안함이라는 것은 계속적인 수행을 해서 내가 어떤 것이 되는 것이기 보다는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 왔을 때 바로 그곳에 진정한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란 무엇일까요? 부처님을 예로 든다면 부처님 시대에는 바라문 수행자들이 있었고 그 바라문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요가를 수행을 했었지요. 요가수행은 8단계의 수행법이 있습니다. 1단계를 야마라고 해서 금지하는 규칙을 지키는 것, 2단계는 니야마라는 좋은 규칙을 권하는 것, 1단계 2단계는 불교로 치면 계율에 해당하지요. 그리고 몸동작으로 수행하는 아사나의 3단계와 호흡을 통한 수행인 프라나야마의 4단계가 있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이미 다 했던 거예요.



부처님이 진정 하고자 했던 것은 깊은 단계의 편안함,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인생의 생로병사라는 ''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정말로 알고 싶었지요. 부처님처럼 처자식과 부모를 두고 떠나는 마음은 어마어마한 고통이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있던 익숙한 환경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끊고 어떠한 것을 향해서 간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닐텐데 부처님은 아마도 마음에 그것을 넘어서는 엄청난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부처님이 처음에 만났던 스승들은 당시에 엄청난 경지에 와 있는 요가와 명상의 스승들이었죠. 부처님은 그들로부터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 색계, 무색계' 가 있다면 '무색계'의 수행으로 바로 들어갔지요. 무색계의 수행에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네 단계가 있는데 이것은 요가수행에서 생각이 완전히 끊어지고 의식이 고요해진 상태, 요가8단계의 마지막 단계인 '삼매'의 상태이지요. 부처님은 이 삼매의 상태에 깊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삼매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다시금 생각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각이 돌아온다는 것은 내가 있음을 말하지요. 부처님을 가르쳤던 스승들은 충분한 삼매상태에 들어갔으니 다 되었다고 했지만 부처님은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의심스러웠지요. 삼매에는 들어갔지만 이것이 궁극의 깨달음임 무언가는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던 겁니다.



근세 인도성자인 라마나 마하리쉬도 일찍 삼매에 들어가서 벌레들이 살을 다 뜯어 먹는데도 텅빈 의식의 상태에 있었지요. 그렇지만 삼매에 들어갔다가도 거기서 나와 눈을 떠서 보면 그곳엔 '나'라고 인식되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요가에서는 이러한 삼매상태를 수행의 가장 깊은 단계라고 이야기 하지만 라마나 마하리쉬도 나중에는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했지요.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수행자가 목이 말라서 제자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키고는 바로 삼매에 들어갔는데 너무나 깊은 삼매로 세월이 많이 지나버립니다. 옆에 시중들던 제자가 없어질 만큼... 그런데 삼매에 들었던 수행자가 삼매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말이 '물 떠왔나' 였어요. 생각과 나라는 개체가 다시 돌아온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삼매자체는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라고 하시며 다음으로 고행의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힌두교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놓고 영혼은 윤회와 함께 계속 성장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반면 육체가 바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육체가 가진 욕망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기에 고행을 강조했지요. 부처님의 수행기간 중 삼매수행은 1년이었지만, 고행수행은 5년을 합니다. 5년의 고행을 하면서 먹는 거 끊고, 잠도 안자고, 눕지도 않고, 가장 처절하게 수행을 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도 원했던 편안함은 없었지요.



부처님이 그렇게 고행을 하다가 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장 편안했던 그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이 한가로운 오후에 나무 밑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던 그 편안함. 그래서 그때 당시로 다시 한 번 돌아가고 가만히 앉아서 그 편안함 속으로 들어가 본거에요. 가만히 앉아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냥 '' 했지요. 처음에 호흡을 관하다가 생각을 관하다가 일어나는 많은 것들을 관했어요.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면서... 그리고 그때 12연기라는 생명의 흐름을 깨댇게 됩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고통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고민하면서 고통의 시작은 '무명'에서 시작되는데 이 무명은 우리의 지닌 무지를 말합니다. 진짜 자기를 모르는 것, 진실을 모르는 것, 그 무명이 '' 을 만들어 내고, 이 행이 업인데 이 업이 '' 을 만들어 내고, 식이 '명색'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 '노사'까지 갑니다. 인간의 생노병사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깨닫게 되면서 인간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고통을 겪는지를 보신 것이지요. 하지만 이때도 아직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보고 나서 딱 눈을 떴을 때가 새벽이었어요. 그 새벽에 눈을 뜨고 샛별을 딱 보는 순간 부처님이 그때 바로 진실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로 할 순 없지만 '불이중도' 라고 표현합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분별이라는 게 없고, 모든 건 그냥 하나라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불이중도' 를 다른 말로 하면 그냥 마음뿐이다이며, 나 라는 게 없음이지요. 부처님이 깨닫고 나니까 우리는 항상 그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한번도 그것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알려줘도 모든 사람이 다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엄청난 고민을 하신거에요.



처음에 부처님이 가르친 다섯 제자들은 일주일만에 모두 깨닫게 되는데 그때 방편으로 썼던 것이 사성제였어요. 인간의 고는 왜 일어나는가? ''를 일으키는 것이 '집착' 이고, 그 고를 '' 하는 방법의 길이 있는데 그 길로서 '팔정도'를 이야기 하게 됩니다. 이러한 팔정도는 우리가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땟목과도 같아요. 팔정도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강을 건너는 하나의 땟목으로 주었지요. 그 땟목을 가지고 자기 인생의 강을 스스로 건너야합니다.



우리 인생의 강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 의식의 장에 있고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강을 건넜을 때 나왔던 것이 '삼법인'입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이 삼법인이 바로 깨달음의 모양이지요.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무아와 무상과 고(고를 벗어났을 때 일어나는 것이 열반) 이 세 가지를 바로 깨달음의 징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세가지의 상태에 지금 자신이 들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금 '나 없음'의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는 사실은 '나에 대한 집착,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 에 대한 의심, 이것이 불교에서의 '' 에 대한 화두입니다. ''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라는 화두 그것은 마음자체를 이야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자 화두를 가지고 계속 돌파를 해서 아무것도 없는 무아의 상태를 체득 합니다. 그리고 무아를 체득한 후 다시 '보임'을 합니다. '보임'은 어떻게 보면 나라는 개체가 가지고 있던 습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의식 속에 쌓여 있던 많은 것들을 닦아내는 과정입니다.




상담을 받기위해 여기 온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적인 고통으로 여기 와 있습니다. 상담이란 그러한 심리적인 고통이 모두 허상임을 정확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지요. 우리네 삶은 원래 아무 문제가 없지만 나를 집착하고 내가 있다는 의식으로 모든 것을 분리시키는 분별심으로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자신이 지닌 마음의 구조를 정확히 깨닫게 되면 자유로움이 옵니다.



상담은 지금 자신의 문제가 진짜 너무 고통스러워서 오게 된 것이지만 그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 보면 순리에 어긋나 있는 망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순리에 어긋나 있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정견' 을 갖고 올바른 사고를 하고 있지 못하고 왜곡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왜곡된 사고를 알아차리고 올바르게 바라보는 훈련이 심리상담의 목적입니다.



나의 사고가 어떻게 왜곡 되어있는지, 나의 경험이 어디서 잘못 됐는지, 내가 어디서 나를 집착하고 있는지를 먼저 탐구해야합니다. 제일 먼저 자신을 탐구해서 자기의식 속에서 왜곡된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바로 1단계의 수행입니다. 의식이 바로 서면 그 다음에 이걸 가지고 내 안에 있던 감정과 내가 원했던 욕구들에 대해서 좀 더 따뜻하게 수용해주는 자비로움을 길러주는 것이 2단계 수행입니다. 그리고 자비가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면서 내가 내안의 내면아이의 감정을 잘 공감해주고 수용해 주기 때문에 이것이 외부를 향해서도 자연스럽게 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체와 하나가 되는 3단계의 수행입니다.



저는 나없음과 생각이 쉬는 깨달음을 체험 한 후 근 10년을 상담을 하면서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루어 보았어요. 처음 한 2년 동안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긍정적인 최면으로 의식을 바꾸어 주려고 해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의 의식의 구조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 사람이 자기의식의 구조 속에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최면시키고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자신의 왜곡된 생각, 그 왜곡된 생각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인 감정, 사람들은 이런 것을 마치 자기라고 착각하며 집착하고 있었지요. 그들이 어떤 마음구조 속에서 왜곡이 만들어 졌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집착하는 최면에서 벗어나도록 했지요. 치유라는 것은 결국은 왜곡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생활명상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앞으로 이것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성입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해야합니다. 그동안 제가 심리 쪽으로 해왔다면 이제는 조금 더 명상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치유에서 깨달음까지'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꿈을 꾸게 되면 꿈속에는 두가지의 개념인 시간공간을 중심으로 개념의 장이 만들어집니다. 시간이라는 것과 공간이라는 것은 원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는 개념 속에서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고 내가 존재함을 만들어냅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드려움에 도망치기도 하고, 원하는 뭔가를 추구하기도 하고, 우월감에 우쭐대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자신의 의지로서 어떻게 할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요.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의식에서 그냥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리얼한 현실과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꿈을 깨는 순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삶과도 똑 같습니다. 이 삶도 의식이 꾸고 있는 꿈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듯이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 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하나의 의식이 만든 개념입니다. 이런 진실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고 수많은 선사와 성자들이 깨달은 것이지요. 선사들의 어록이나 경전들은 모두 이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원론의 의식에 갇혀 분별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런 진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자기 내면에 있는 무의식을 바로 정리하여 투명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냥 자기의식에서 생겨나는 인연생기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진실한 편안함이란 깨닫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만이 우리의 실체를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의식이 만든 허상의 세계를 살게 되고 그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그러기에 고통도 허상이고, 그 고통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 노력도 모두 허상입니다. 우리가 실체를 알게 되면 저절로 편안합니다. 그것이 깨달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야할 곳은 바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라' 이 말은 뭘까요?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짐이 없습니다. 여기에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은 자신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왔지만 저희들은 문제없음을 부여줍니다. 문제 있다고 느끼는 본인의 왜곡된 사고를 알아차림으로서 실재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실제는 무엇일까요? 그냥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냥 '그러할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러할 뿐인데 거기에 나의 기준과 의도대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이 진리를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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