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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수준을 말할 때 의식수준이 낮다는 말은 유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때 자기중심성은 사물과 상황을 인지하는데 있어서 상대의 것은 보지 않거나 듣지 않고 자기 식에 빠져 왜곡되게 상황을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아직 인지가 덜 발달되어있지만 자랄수록 인지는 커져갑니다. 인지가 커져가는 과정에서 어릴수록 아이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부모와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엄마나 아빠가 아이의 장난감이 좋다고 하면 아이의 세계에서는 부모가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야하면 아이는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도 중요할 것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사실 아이의 장난감에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어른이 자기아이의 장난감을 빼겠어요. 하지만 자기중심성의 인지왜곡에 빠진 아이에게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지의 수준이 자기중심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외부의 상황을 자기식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의 세계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대가 표현하지 않는 것을 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상대와 소통하려면 스스로 모름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묻는 것이 기본입니다. 내 것을 내리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귀를 여는 것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시작입니다. 만약 대인관계가 힘들고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아직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식대로 상대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자기중심성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움으로 보는 생존의식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상대와 서로의 필요를 나누는 마음보다는 불안으로 자기 것을 움켜쥐려고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생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을 유아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보다 성숙된 어른스러움으로 성장해야합니다. 의식이 성숙할수록 생각은 더욱 깊이 사고하고, 감정의 공유는 더욱 넓어집니다.



하지만 의식이 좁아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자기 식대로 세상을 보고, 자기경험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왜곡인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지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할수록 우리의 현실은 왜곡됩니다. 삶에 일어나는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그 순간에 맞는 적절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인지의 왜곡 또는 감각의 오류라고 합니다.



인식의 왜곡에 빠져 보이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듣는 것을 자기식대로 해버리면 우리는 자기만의 환상과 꿈속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통이라 부릅니다. 삶의 진실과 사실을 만나면 문제는 원래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앎의 왜곡과 착각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 외부는 모두 문제로 보이게 됩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자기중심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모름에 대한 겸손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뭔가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더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상대를 알려고 노력을 하고, 상대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고통은 커져갑니다. 그래서 모든 수행단체에서 얘기하는 것이 "내려놓아라, 버려라, 겸손해라, 낮아져라...."고 얘기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더 높아지려고 수행을 하거나, 뭔가 더 특별해 지려고 수행을 한다면 그는 수행으로 자기착각의 수단으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이단이나 사이비단체들이 특별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심을 이용하여 지기중심성을 살살 긁어 주기도합니다. 그래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무지한 사람일수록 그런 가르침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좀 더 합리적이고, 좀 더 사고가 열려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야하면 의식이 성장할수록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주변사람을 살리는 이해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외부가 아닌 우리의식의 산물입니다. 자기의식의 상태가 바로 세상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지닌 것을 투사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내 것을 쓰면서 살면 됩니다. 사랑과 이해는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내안의 것을 쓰는 것입니다. 쓸수록 이해와 사랑은 커져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받고 싶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사랑을 얻으려고 합니다. 받으려하고 얻으려 할수록 우리는 기대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고통스러워합니다.



자기중심성에 빠진 사람일수록 자기 것에 더 예민하고, 주변을 더 분별합니다. 예민함과 분별심이 커지는 것은 결국 자기안전을 지키려는 방어패턴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기준에서 벗어난 작은 것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외부의 작은 불편도 못 견뎌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는 피해는 보지 않고 상대가 내는 작은 불편에 커다란 피해의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성이 커질수록 수용력은 작아집니다. 그것이 그들의 고통입니다.



의식의 성장이란 보다 큰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름을 다름으로 반응하는 유연함입니다. 의식이 좁을수록 삶은 투쟁이 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라면 의식이 성장 할수록 삶은 누림이 되고 상황들은 즐거움이 어울리는 놀이와 같아집니다. 원래 삶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의식이 지은 착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강도에게 쫓기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도망치거나 피해를 보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꿈을 깨면 없습니다. 강도도 꿈이고, 노력도 꿈이고, 피해도 꿈입니다. 꿈속의 자기 또한 꿈속의 인물일 뿐입니다.



자기중심성은 결국 자기의 꿈속과도 같습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할수록 그 사람은 자기 꿈속을 헤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생각에 집착되고, 감정에 집착되고, 욕망에 집착되어 그것이 마치 실체인양 붙들고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체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지 그것(생각, 감정, 욕망)이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진실을 바로 알아야합니다. 의식의 성장은 이런 자신에 대한 앎의 성장이자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실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각자의 의식수준에서 우리는 자신이 만든 의식의 세계를 실체로 착가하고 살아갑니다. 마법적이고 유아적인 환상 속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마법적인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세계에는 귀신이 존재하고, 천사와 악마가 존재하고, 심판의 신이 존재하며, 생각의 이원성이 만든 수많은 환영들이 존재합니다. 그 사람에게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 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의 세계입니다.



인류는 이런 유아적인 의식의 단계를 BC 6세기 인도의 부처님, 중국의 노자와 공자,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거치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의식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유아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상대를 함께 바라보는 이해의 눈을 길러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작은 틀에 갇혀있지 않고 보다 큰 하나의 세계 속으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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