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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질문의 근본에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감정은 왜 일어나는가?, 사람들과 관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등등 이 모든 질문의 밑바닥에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구체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 그것을 행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의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의 정의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사실 라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합니다. 생활명상은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 아닌 실체로서의 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쌓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틀리느냐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며, 삶을 잘했는가와 못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리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나라고 하는지에 대한 자기한계를 탐구해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라고 규정하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의식의 초점을 자신보다 외부에 두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나 가까운 가족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편이 되곤 합니다. 왜야하면 안전이나 인정이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관심의 초점은 언제나 자신이 우선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것들을 보아야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사회적으로 내 것과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부모님이나 주변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어떤 것을 해야 주변사람이 좋아할까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우리가 우리자신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비추어주는 부모나 주변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을 만한 행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나 부모가 정해 놓은 것을 하지 않으면 잘못 했다고 야단을 맞거나 비난을 받아야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자기 것을 주장하면 이기적이고 문제 있는 아이가 되어야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는 자기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살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될수록 상대에게 맞추어 문제가 없으면 잘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직접적인 문제를 회피하거나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억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은 원래 문제투성이였습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고 새로운 문제를 처리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삶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를 만드는 것은 라는 정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며 가 바로 문제의 초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모든 문제는 지금 일어나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규정과 자기한계의 모양에서 비롯됩니다.



라는 한정된 의식을 우리는 에고라고도 부릅니다. 에고는 지금의 현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 모든 현실을 문제로 봅니다. 자신이 만든 이미지나 가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 에고는 지금의 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념과 기준의 틀에 갇혀서 허상의 세상을 봅니다. 에고는 지금의 현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야할 문제로 봅니다.



하지만 사실 문제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진실을 보지 못하는 에서 비롯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 집착하는 만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보다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실에 대한 직면은 에고가 그동안 쌓아온 허상을 깨뜨리기 때문에 에고의 입장에서 직면이란 두려움자체이기도합니다.



에고는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과 귀를 닫고 익숙한 개념과 관념의 틀에 삽니다. 관계의 불평등을 주장하지만 관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표현하지 못합니다. 에고는 우리는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잃어버릴까봐 사실을 안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한 선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힘들었던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잠깐 앉아서 차를 마시라고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습니다. 그가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고 차의 물을 보는 순간 찻잔에 있던 물이 커다란 호수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호수로 들어가서 호수의 아름다움에 심취했습니다. 그때 그이 이상형인 한 처녀가 나타납니다. 처녀도 그를 보고 반하여 둘이는 처녀의 집으로 가서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첫째는 아들을 낳고, 둘째는 딸을 낳았습니다. 재밌게 살다가 어느 날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병이 들자 약을 구하며 모든 노력을 해보았지만 아들은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러자 부부는 너무나 낙심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딸도 낭떠러지에서 사고를 당해 죽게 됩니다. 그러자 부인은 너무 고통스러워하다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그리자 그는 자신도 죽으려고 호수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지금의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찻잔에 있는 차는 따뜻했고 그는 차를 마셨습니다. 그때 선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떠올리면 생각 속에서 한평생을 살기도하고 이곳에서 우주로 나아가기도합니다. 잠깐 차를 마시는 순간 한 생각은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 여기입니다. 이 자리로 돌아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생각에 빠져있음을 모르면, 자기만의 개념과 한계의 세계에 갇혀버립니다. 한 생각의 무지를 우리는 업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닌 업식의 패턴을 알아차리고 운용하는 방법이 생활명상입니다. 생활명상은 일어나는 업식을 전환하여 지금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삶에는 원래 고정된 실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변하기에 무상(無常)하며, ‘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기에 무아(無我)입니다. 하지만 무상과 무아는 조건과 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음 속에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하나의 생각이 만든 집착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명이요, 한 생각을 알아차리면 밝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무지에서 생겨납니다. 무지가 업식을 만듭니다. 업식에 빠지면 우리는 업식의 거울로 세상을 투영합니다. 업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자 틀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업식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에 같은 상황과 세상 보더러도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바라봅니다. 상대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상대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꿈속에서 강도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우리는 그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오만방법을 쓰지만 그것조차도 꿈입니다. 꿈을 깨서 보면 강도도 위협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꾸는 업식의 꿈을 부처님은 환상 또는 무지라 했으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을 깨달음 또는 반야라 했습니다.



의식의 꿈에는 범죄영화, 멜로, 스릴러, 액션...등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주로 어떤 장르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을까요? 그것을 알 때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돌아와 지금의 진실을 바로 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업식의 패턴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감정적으로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로워져서 상황을 넓게 보는 마음을 길러야합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보다 유연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자신이 누구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받아들임과 경험은 전혀 다르게 됩니다. 우리가 지닌 인생의 모든 문제와 고통의 초점에는 언제나 자기정체성의 문제가 내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정체성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부터 모든 앎이 시작됨을 명심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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