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제목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 욕구의 투영


지난 한 주간 재미있게 연구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연구가 점점 재미있어지는게 기뻤고, 재미있는 게임에 이끌리듯 연구를 하는것을 통해 힘을 얻으며 살고 있었다. 내 생각엔 가치있다 생각되는 좋은 아이디어도 떠올랐고, 그 아이디어가 현실성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걸 스스로 납득시켜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현상을 나는 연구가 잘 풀려간다고 정의 내렸고, ‘연구가 잘 풀린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러나 어제 금요일, 한국에 있는 연구실 선배들과의 채팅 중 갑작스런 실망감에 내 안의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연구실 선배들에게 이거 완전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내 아이디어를 설명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사실 별 가치가 없는 아이디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대에 부풀어 오른 마음은 툭 하고 터져버렸고, 더 공부를 하고 남의 연구를 분석하고 더 열심히 고민해봐야 한단 사실에 기운이 빠졌다. 난 그런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리고서 괜찮아,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아이디어가 가치 없다고 네가 가치 없는 게 아닌걸.” 하며 스스로를 다독여 보았지만 실망감은 어딜 가지 않았다. 아무 가치가 없는 허상을 붙잡고서 (예를 들어 연금술 같은) 그 허상에 온갖 에너지를 불어넣고 키워오다가, 그것이 허상임을 깨달아버린 허망함 같았다.



사실 따져보면 모든 게 허상이라고,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위도 허상이고 연구도 허상이니 붙잡을 것도 없고 잘 되고 말고도 없으니 편하고 재미있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연구란 것에 나의 에고를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었나보다. 예전과 같은 쫓기는 불안감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 대신 일에 나의 욕구를 투영하고서, 일을 통해 욕구가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나보다. 어쩌다 떠오른 아이디어란 것에 내 아이디어란 이름을 붙이고서 나와 동일시했으며, ‘이건 참 괜찮은 아이디어야란 주문을 외우며 이 아이디어가 나의 꿈을 이루어줄꺼야라고 애지중지 보호하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한 번 되짚어본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붙잡고 있나.


1> 연구 -> -> 사랑:


연구가 잘 풀려야인턴을 구할 수 있다. 인턴을 구해야 경제적으로 풍족할 수 있고, 연정이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2> 연구 -> -> 인정:


연구가 잘 풀려야졸업을 제 때에 할 수 있다. 졸업을 '제 때에해야 어서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사람들에게, 부모님께, 떳떳할 수 있다. 주위의 일부 사람들이 나의 결혼에 부정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충분한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돈을 벌어야 나는 사람 구실하며사는 것이고, 그래야 부모님께 모욕(?)을 안 당한다. 내가 돈을 잘 벌면 돈도 못 버는 게 결혼은 무슨같은 소리를 안 들을 것이고, 나와 사는 그녀도 주위의 걱정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들은 사실일까?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그녀는 미국으로 오지 않고, 결혼도 잘 안 풀리고, 사람들도 반대하고, 생활도 안 되고 그럴까? 그렇다. 내 생각에선 너무나 그럴 것만 같다. 내가 어서 졸업하고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녀의 부모님도 말리고, 그녀도 돌아서고, 우리 부모님도 말리고, 선생님들도 말릴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선 내 일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적고 보니 결국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인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것만이 전부라면, 왜 난 여기에 있는가? 만약 그녀가 난 그냥 한국에 살란다.’ 하면 난 주저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 보니 또 다른 욕구들이 떠오른다.



1> 내 능력을 마음것 발휘하며 살고 싶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나의 역량에 못 미친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은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비효율적인 관습을 따르는 것, 개선을 제안해도 움직이지 않는 집단적 경직성 등이 너무 답답했다. 그런 상황을 겪을 때 마다 난 무언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어떻게 고쳐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집단적으로 안주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문제를 제기해도 니가 뭘 아는데라며 귀 기울이지 않거나 관습적 구태를 바꾸기 번거로워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조직 분위기가 너무 갑갑했다. 나는 그런 경험을 통해 내 목소리를 내고 나를 발휘하려면 우선 능력을 갖춰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겪은 한국 사회와 조직은 그럴듯한 타이틀이 있어야 조금이나마 내 얘기가 먹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2> 자유롭고 여유롭게 삶을 누리면서 돈도 잘 벌고 싶다.


말하자면 9시 출근 5시 퇴근 하면서 연봉도 1-2억쯤 받고 싶고, 일년에 휴가도 한 달쯤 누리고 싶다. 일 하면서도 나와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고, 일과 직장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국 대기업엘 가면 8시 출근 7시 퇴근하면서 5-7천쯤 받을 것이고, 중소기업엘 가면 더 많이 일하면서 연봉도 3천쯤 받을 것이다. 자녀가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주지 못할 것이고, 휴가는 1주일도 안될거고 사생활도 배려받지 못한다.



만약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그녀와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면, 위의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쉽사리 놓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 놓아야할 필요가 있는 욕심이라면 욕심을 놓아야할 상황이 벌어질테고, 그럼 그 때 가서 또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겠지. 어차피 삶이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저 내가 이런 욕구를 갖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고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지 않을까.




# 고통을 마주하며 내려놓기



오후 세 시, 아픈 몸을 이끌고서 기어이 산책을 나섰다. 밖은 영하 4, 콧물이 줄줄.. 하지만 잠도 잘만큼 잤는데, 들어누워봤자 뭐가 나아지겠나 싶어 밖으로 나온 것. 눈이 덮인 호숫가를 한 시간쯤 걷고, 카페에서 일기를 써봤다. 글을 풀어놔봤지만 온갖 생각이 덕지덕지 붙어 가슴은 조이고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속에 빠져있었다.



부모님과 통화를 한다. 상견례 날짜를 잡으려 해본다. 한국 갈 때까지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데다가 양가의 사정 모두 고려해야 하기에 미리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부터 그러냐라고 하며 못마땅해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양쪽의 사정을 모두 고려해야하고 연말엔 각자의 스케줄이 있을 것이니 미리 말씀드리고 배려드리려는 차원에서 연락했다라고 얘기했다.



엄마는 왠지 나에 대해 경계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 공부의 진척상황, 등등을 말씀드리고 안심을 시켜드릴 의도였는데, 엄마는 관심이 전혀 없는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걸 얘기했는데도 그래, 감기 조심하고하며 마지못한 의례적인 인사를 건낸다. 그래 이것이 우리 엄마란 사람일 뿐. ‘엄마가 어찌..’ 하는건 나의 기준일 뿐. 엄마의 반응은 엄마의 것일 뿐.... 하지만 내면아이는 힘들어했다. ‘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했다. 따뜻한 베트남 쌀국수 한 그릇에 콧물이 쑥 들어간다. 그녀와 따뜻한 통화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정처없이 드라이브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온갖 생각들을 그냥 툭 놓아버렸다. ‘기가막히는 연구 하나 해야지하는 주문도, 내가 원하는 온갖 욕구도, 결혼도, 잠시 툭 놓아버렸다. 욕구도 원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생명의 반응이고 있는 그대로 좋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없지 않은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나의 집착일 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집착으로인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또 다른 생각들을 덧붙이며 자꾸만 엉겨들어가고 있는 우스운 꼴 아닌가



이러한 과정들을 그녀와 함께 나누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함께해 주는 그녀가 너무 고마웠고, 예전보다 훨씬 열린 마음으로 나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그녀의 변화가 감사했다. "그럴 뿐~” 하시는 주님을 보고 배운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그럴 뿐~” 해 본다. 웃긴다. “엄마는 그냥 그럴 뿐~”, “연구도 그냥 그럴 뿐~”, “나의 고통도 그냥 그럴 뿐~”.



아마 나의 저항과 엄마를 바꾸려는 욕심이 엄마의 저항을 더 키운 것 같다. 뭐 어쩌겠는가. 사람은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라도 저항을 그만두고 그냥 가만히 두는 수 밖에.. 엄마는 그냥 그럴 뿐~. 앞서 써둔 '에 대한 나의 기준을 생각해본다. 능력을 발휘하니, 자유롭니, 돈을 잘 버니, 이런 개념들에 대해 고찰해본다. 그런거 있나? 그냥 나만의 세계에서 만들어낸 허상 아닌가.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는다와 같은 그럴싸한 허깨비 아닌가. 얼마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생각을 아직 붙들고 있는가? 저 생각이 얼마나 많은 분별을 만들어내고 나를 힘들게 하는가? 그럴싸한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분별을 키우고, 좋은 것을 붙잡으려는 마음이 나쁜 것을 피하려는 마음이 되고, 나쁜 것을 피하려는 마음이 이것 아니면 안돼라는 집착을 만들어내고, 그런 집착으로 인해 내 욕심만큼 일이 안될 때엔 마치 큰일이 난 것 처럼 스스로를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 아닌가



오랫동안 외워온 주문의 힘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지만, 잠시라도 한 번 내려놓아 본다. 이것도 툭, 저것도 툭. 에라이 씨발 모르겠다. 또 드라이브를 한다. 김광석 노래를 꽥꽥 따라부르며 도로에 기름을 뿌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무엇이건 할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공간.. 이 똥차의 존재가 눈물겹게 고맙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늘 나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같으면 몇날 며칠이고 고통을 붙잡고서 앓았을 텐데. 힘든걸 마주하기 두려워 잠으로 회피했을 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용기를 내어 고통을 마주했지 않은가? 그리고 한나절만에 회복했지 않은가? , 장하다. 큰 발전이다.



습관적으로 손톱 가의 피부를 물어뜯으며 생각한다. 엉망이다. 난 이 엉망을 수습하고자 한 가닥 물어뜯고, 또 요거 하나만 더 뜯고, 그랬는데, 왜 이녀석은 갈수록 엉망이 되어갈까. : 가만히 놔두면 낫는다. 생각을 해결하려 또 생각을 붙이고 생각을 붙이고.. 그럴 수록 고통 속으로 빠지는, 그런 원리랑 비슷한 것 같다. “좋은 생각, 하지마. 그냥 생각을 쉬라고 . 붙잡으면 또 끄달려 들어가는거야잉하는 말씀이 귓가에 울린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저희 홈피를 찾아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5] 관리자 2008-03-24 77521
공지 <나를 꽃피우는 치유 심리학>이 출간되었습니다. imagefile [5] 성원 2009-12-21 84794
1213 화공님의 자기탐구일지... 원장 2016-12-13 485
1212 미래사회에서 인간이 할수 있는 일... - 변 원장 2016-12-06 557
1211 미래님의 생활탐구일지... 원장 2016-12-05 541
1210 진아님의 탐구일지... 원장 2016-12-05 585
1209 욕구의 충돌과 업식 imagefile [1] 원화 2016-11-24 911
» 유학생횔하며 정리하는 자기탐구일지... - 준님 image 원장 2016-11-21 759
1207 행동한 것만이 자기 의식의 길이 됩니다. - 성... 원장 2016-11-07 785
1206 주고받음에 관한 정당한 거래... - 성원님 원장 2016-11-07 764
1205 분별을 내리면 .. - 성원님 원장 2016-11-07 762
1204 자기실현의 즐거움.. - 성원님 원장 2016-11-07 787
1203 단식을 하면서 & 하고 난 뒤... - 소현 원장 2016-10-27 783
1202 진아님의 탐구일지... 원장 2016-10-14 857
1201 내것을 표현하는 것이 주는 힘... 나무님 원장 2016-10-14 746
1200 미래님의 생활탐구일지... 원장 2016-10-13 745
1199 금강님의 생활탐구일지... 원장 2016-10-11 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