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제목
> 커뮤니티 > 원장님칼럼

에고의 환영에서 깨어나라....

조회 수 980 추천 수 0 2016.04.02 11:29:02

인간은 누구나 본질의 마음이 있고 에고의 마음이 있습니다. 본질의 마음을 존재라 하고, 행복, 불성, 기쁨, 지혜, 사랑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며, 에고의 마음은 행위를 통한 욕망과 욕구, 탐욕으로 표현됩니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욕망이 충족되어야 자기존재가 충족되고 자신의 삶이 충족되어지고 괜찮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에고의 입장에 서있는 마음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권력이나 인기와 명예, 돈과 소유물을 많이 가져서 자신의 에고를 확장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에고는 아무리 키워도 잠깐의 만족은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에고의 마음이 아닌 존재의 근본마음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상처나 부족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자체로 스스로 온전하고 가득 차 있는 생명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힘든 것은 존재가 아닌 에고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념화된 사고의 패턴과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고는 실체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형상과 이미지를 붙들고 그것에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져다 붙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언제부터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라는 것이 몇 살 때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라는 게 제일 처음 생겼던 게 보통 4,5살 정도에요. 그때 나라는 기억이 생겼습니다.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없습니다. 그전에는 나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있다 걸 느끼는 순간부터 나와 다른 대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도 나타나고 엄마도 나타나고 외부의 상활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내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있다고 하는 순간 세상과 나는 분리되어 버립니다. 분리감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나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뭐가 생겨난 것일까요? 나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나라고 느꼈을까요? 내가 있다는 느낌을 처음 느끼면 우리는 나라는 것을 몸에 한정을 합니다. 이게 나야. 이 몸이 나야. 저쪽은 내가 아니야.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몸에 갇혀버립니다.

 

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전체로 존재했습니다. 실제적인 우리의 탄생은 나라는 기억이 생겼을 때 태어난 것입니다. 그전에는 스스로의 나는 없었습니다. 분리감은 몸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몸에 대한 집착은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몸에 대한 집착은 두려움을 만듭니다. 몸이 잘못되거나, 병이 생기거나, 이상이 생기면 엄청난 두려움이 생각에서 일어납니다. 몸이 나라고 생각은 몸이 없으면 나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에고는 실체가 아닌 동일시가 만든 환영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에고는 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몸이 없으면 나가 없고, 몸이 있더라도 거기에 나라는 의식이 없으면 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신지체라든가 식물인간은 나라는 생각이 없기에 상대도 없습니다. 몸이 죽으면 나는 없어집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라는 에고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욕구를 내리거나 쉰다는 것은 에고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두려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에고는 진정한 깨달음으로 깨달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깨닫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깨닫고 싶은 것이 아니라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깨달음 에고하고 아무관계가 없습니다. 에고에게 깨달음은 특별해지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고,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싶은 가장 큰 욕망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거 다 해봤는데 별거 아니니까 더 특별해지고 싶은 에고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 깨달음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면 에고가 깨달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에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결정해야 될 것은 진짜 깨닫고 싶냐와 아니냐? 의 오직 두가지 선택만이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꿈을 꾸느냐? 입니다. 꿈이 너무 좋아 꿈을 깨기 싫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꿈도 꿈이고, 나쁜 꿈도 꿈입니다. 잠속에서 누구나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내가 등장하면 대상들도 모두다 등장합니다. 풍경도 상황도 여러 가지 것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등장하고 상대를 등장시키고 많은 것들을 등장시킵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힘든 꿈을 꾸거나 재밌는 꿈을 꾼다든가 합니다. 하지만 어떤 꿈을 꾸던 그 사람은 꿈꾸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다 꿈입니다. 누가 그걸 만들었을까요? 자신의 의식이 만든 것입니다. 생각 속에서 혼자 고민하고 뭔가 계획하고 있지만 생각은 실제가 아닌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찰라만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극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악몽을 꾸고 있다면 우리는 깨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즐겁고 좋은 꿈을 꾸고 있다면 꿈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좋은 꿈을 유지하려는 것도 집착이고, 악몽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꿈속의 일이고 깨어나면 그것은 환영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어잇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과 에고적인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에고의 특징 자체가 동일시와 집착입니다. 일어나는 상황을 나를 보는 수단이나 방편으로 쓰면 좋지만 그것들에 집착해서 싫고 좋고에 빠지면 고통에 빠지는 것이 삶입니다.

 

본질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에고를 쓰는 것은 괜찮지만 에고자체의 존재감을 확장하거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깨달음과 거리가 멉니다. 에고는 오감과 오감이 만든 상에 집착합니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 에고의 욕망이고, 귀로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 욕망이며, 코로 좋은 냄새를 맡고 싶고, 감각의 쾌락에 빠져드는 것이 고통입니다.

 

명상은 이런 에고의 감각적 집착에서 쉬게 합니다. 에고의 추구와 욕망을 쉬게 하는 제일 좋은 것이 힘을 빼는 것입니다. 힘을 빼면 저절로 우리는 비로소 쉼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고는 끊임없이 더 많은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욕망이란 결국엔 힘을 말합니다. 직업도 힘이고, 돈도 힘이고, 인기도 힘이고, 권력도 힘입니다. 힘을 가지면 힘을 가진 만큼 에고가 커집니다. 에고가 큰 사람일수록 힘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기 삶을 어떤 방향으로 나갈 건지 좀 더 선명하게 해서 나아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고의 익숙한 두려움과 수치심의 감정에 놀아나기 쉽습니다. 그것은 에고가 느끼는 것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혼자 자기망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는데도 자기생각 속에서는 쳐다본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전개해나갑니다 망상과 환영의 세계에 빠져들어 갑니다. 꿈을 꿉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추어야합니다. 꿈속에서는 나가 있고 대상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꿈속의 세상입니다. 그것을 만드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만들어 낸 에고의 환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