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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님의 생활탐구일지....

조회 수 630 추천 수 0 2016.08.26 14:07:32
안녕하세요. 준입니다. 대구는 더위가 한 풀 꺾였다는데 잘 지내고 계신지요? 비록 멀리 있지만 팟캐스트에 올려주시는 강의를 짬짬이 들으며 생활하니 마치 센터에 다니고 있는듯 닿아있는 것 같아 참 좋습니다. 저는 요즘 다시 미국의 일상으로 복귀해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일도 일상도 예전보다 가볍고 즐겁습니다. 생활도 규칙적이고 마음의 부담도, 초조함도 없는 것이 최근 한 주간은 별로 걸릴게 없었네요. 이런 변화의 기회들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상의 규율과 나를 위한 일상의 변화

대구를 다녀오기 전, 삶과 일은 마구 엉켜있었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얼핏 자유로운 생활처럼 보였지만 밤이 오면 마지못해 잠들고, 아침이면 마지 못해 일어나는 삶이었다. 일을 안하고 빈둥거려도 재미는 없었고, 일을 하려들면 초조함이 마구 몰려오는 탓에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대구에서 미국은 생각도 안하며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니, 불과 3주간의 여행이었지만 내 마음가짐도 새로웠다. 연구를 대하는 나의 태도, 내 삶의 방식 등을 내가 원하는대로 다시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법인 선생님의 충고에 따라 나만의 ‘의식’을 수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의식이란 일을 하는 일상 생활에서 나만의 틀을 잡고 그 틀을 따름으로써 마음을 모우는 것이다.


1. 출퇴근: 가장 먼저 출 퇴근부터 확실히 하기로 했다. 내가 출근을 하건 퇴근을 하건 아무도 터치하는 사람도 없으니 ‘자유롭다’ 생각하고 과거엔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규율 없이는 내 스스로가 너무 끝도 없이 풀어졌다. 어떤 마음을 다잡는 행동보다 확실한건 한 장소를 꾸준히 오가는 것. 나를 만나기위해 센터에 나가듯,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연구실에 가는 것이다. 늦어도 8-9시까진 출근하고, 놀더라도 5-6시까진 연구실에 있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어떻게보면 어떤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업무시간인데 이정도도 하지 않고 살았단 것이 놀라웠다.


2. 일과 생활의 분리: 예전엔 “일이야 어디서건 할 수 있는데”란 생각으로 공연히 카페를 돌아다니거나 ‘집에서 일하곤’ 했는데, 뒤돌아보면 그렇게는 일이 잘 안 되더라. 여기 저기서 일을 하자니 마음가짐을 가다듬는게 쉽지 않았고, '언제까지 어디로 가서 일 한다’라는게 없으니 규율이 잘 안 잡혔다. 무엇보다도 일 외적인 삶과 일이 분리가 잘 되지 않아 집에서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일을 해도 일한 것 같지 않았다.

생산성도 낮았을 뿐더러, 집에서도 밖에서도 연구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를 완전히 쉴 수가 없었다. 삶은 버거웠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연구란게 원래 그렇다). 일은 최대한 일터에서만 하기로 마음 먹으니 마음이 좀 더 가벼워져 퇴근을 한 뒤에는 확실히 놀거나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일은 일터에서만 한다고 생각하니 업무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궁리하게 되었다.


3. 연구실을 머물기 편한 곳으로 만들기: 내 마음속에 연구실은 불편한 곳이었다. 창문이 없고 사람들도 친하지 않고, 의자도 딱딱하고 책상도 뭔가 편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연구실을 내 마음에 드는 곳으로 만들기위핸 소비를 아끼지 않기로 했다.

1) 노란 등을 하나 더 뒀다. 작은 칸막이에 둘러싸인 나만의 공간이 보다 포근해졌다.

2) 기계를 장만했다. Sanjai로부터 비싸고 예쁜 모니터를 하나 얻었다. 예쁜 디자인의 모니터 받침대를 장만했다. 예쁘고 쓰기 좋은 무선 마우스와 키보드도 세팅해뒀다.

3) 마음에 드는 소품들을 들였다. 귀여운 카카오프렌즈 피규어, 예쁜 그림 등, 기분 좋은 소품들로 공간을 꾸몄다.

4) 연구실에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 뒀다. 커피포트를 장만하고, 집에서 예쁜 찻잔을 얻어왔다. 몇 가지 맛있는 차를 사둬, 연구실에 가면 우선 차를 달여 마시는걸로 편안하게 일과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뒀다.

5) 베개를 장만했다. 연구실에서 있으면 가장 불편했던 것이 쉬고싶을 때 편하게 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의자도 딱딱했고 쇼파도 따로 없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엎드려서나마 편히 잘 수 있도록 푹신한 쿠션을 하나 사뒀다. 점심을 먹은 후 두 세시쯤 잠이 쏟아질 때 엎드려 잠을 청해보니 과연 꿀잠을 잘 수 있었다. 낮에 피로를 풀 수 있으니 연구실에 오래 있는게 부담되지 않았고, 낮잠으로 피로를 풀고나니 오후에 집중해서 일을 해도 몸과 머리에 부담이 없었다.

6) 연구실의 공용 공간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커피를 타 먹고 프린터를 쓰는 등 사소한 일을 할 때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하니 기분이 좋았다.


4. 부담 없이 일 하기: 생각 해보니 내가 느끼는 모든 압박과 초조함은 허상이었다. 단적으로,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일을 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 문화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한국의 사제관계와 달라,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방향만 지시해줄 뿐 직접 일을 시키거나 명령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내가 일을 안하거나 못하면 내 졸업이 늦어지고 내가 ‘뒤처지는’ 것 뿐이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를 괴롭히는건 나의 기준과 막연한 불안이었다.

스스로 분명하지도 않은, 도달할 수도 없는 높은 기준을 잡아두고서 잘 해야한다는 마음을 내고있었으니, 이런 마음은 나를 열심히 하도록 힘을 싫어주기는 커녕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하더라. 그래서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일은 일터에서만 하고,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만큼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사는게 우선이고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이니 일에 나를 끼워맞출 수는 없다.
 

5. 사람들: 먼저 인사하기고 가볍게 농담하기. 칸막이로 각자의 자리가 막혀있어 서로 서먹해지기 딱 좋안데다가 보통 연구에 집중할 때 방해하는건 실례란 생각에 서로 들고 날 때에 인사조차 하지 않는게 일상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라도 먼저 인사를 반갑게 하기로 했다. 연구 주제가 달라서, 국적이 달라서, 일이 바빠서 등의 이유로 굳이 친해지려 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나를 쓰기로 했다. 교수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가볍게 먼저 인사하고, 얘기할 때에도 마음의 벽과 격식 없이 좀 더 가볍게 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을 많이 하는 Sanjai랑 좀 더 친해졌고, 함께 하는 회의와 토론이 보다 즐거워졌다. 


6. 도시락에대한 부담 줄이기: 생각 해보니 점심 도시락을 싸 가는게 내겐 꽤 큰 부담이었다. 전날 밤에 미리 준비를 해 두지 않아 보통 아침에 요리를 해서 먹고 싸 가다보니 아침에 시간을 많이 쓰는것도 문제지만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힘이 빠져있곤 했다. 또한  그래서 그냥 점심도시락을 싸고싶지 않으면 안 싸겠다고 마음을 비웠다. '그냥 점심 사먹는데 돈 쓰지 뭐’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7. 일과 삶: 내가 이곳에 온 직접적인 이유는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마음이 나태해질 때면 "난 이곳에 연구를하려고 와 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 곤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더 많이 하거나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일을 해야하는데" 하며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고 쉬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직업적인 삶이지, 내 삶 자체가 아니다. 연구는 내 삶의 일부이고,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내겐 항상 나의 삶이 먼저다. 


# 연구를 대하는 마음

어제 오늘 총 네 번의 미팅을 했다. 한국에 가기 전 한 주에 한 시간조차 얻을 수 없던 교수들의 관심이 갑자기 쏟아지고 있다.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모우니 엉켜있던 실타래도 조금씩 풀려가고, 앞으로 내가 하는 연구가 가야할 방향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에 연구를 대하는 나의 시각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겨 적어두려 한다.

얼마전까지 나는 ‘내 연구’를 해야한다 생각했다. 연구를 하는 주체는 나이며 나 말고는 이 연구에 아무도 관심도 책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착각했다. 교수의 태도는 ‘여기 커다란 문제가 있단다. 아마 이렇게 하면 풀릴 것 같은데.. 알아서 풀어보렴’ 하고 툭 던져놓고서 뒷짐 지고 있는 듯 보였다. 풀어야할 문제조차 정의되어있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 혼자서 모든걸 해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연구에 임하니 모든게 두렵기만 했다.


좋은 논문을 읽으면 ‘나는 언제 이런 실력을 갖추지’하는 생각이 들어 초조했고, 좋은 글을 읽으면 ‘난 언제 이 정도의 글 쓰기 실력을 갖추지’ 하고 좌절했으며, 좋은 아이디어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지’ 하며 막막해 했다. 사방 천지에 내가 내 힘으로 해야할 것 투성이었고, 내가 도달해야할 곳 (도달하고 싶은 곳)은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다.

나는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학계가 주목할만한 중요한 문제를 내 손으로 찾아내고, 그 문제를 풀기위한 여러 방법들을 내 힘으로 알아보고, 그 문제를 풀기위한 기법들을 스스로 익히고, 문제를 풀고 논문을 쓰고 해야했다. 아, 그건 너무나도 지기 힘든 무게였다. 그런 마음으로 연구를 대하니 논문만 펼쳐도 초조함이 몰려왔고, 키보드에 손만 대도 10분만에 지쳐버리곤 했다.


그런 생각을 갖게된데는 상황적인 요인도 있었다. 지난 1년간 공을 들인 프로젝트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문제를 풀려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1년만에 파토가 나버렸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막 시작되었는데 지난 1년간 성과는 전혀 없었고, 교수들은 도와줄 생각도 없이 각자 인도로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타국에서 홀로 남겨져 온갖 책임감을 떠안고서 보이지않는 괴물과 같은 문제를 상대하려니 너무 그 무게가 막중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해야한다’라고 생각했던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사과정 1년차가 뭐가 잘 났다고 수십년간 그 분야만을 파온 교수나 할 수 있는 일을 그 수준으로 하자고 덤벼들었단 말인가? 그랬다보니 진척은 없고 스스로 힘들기만 했던건 어찌보면 당연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돌아와보니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황송하게도 내 연구를 위해’ 세 명의 교수가 달라붙어 주간 회의를 열어주었고, 요청할 때 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개인 미팅도 해 주었다. 얘기를 거듭할 수록 실마리는 조금씩 풀려나가는 듯 했고 방향도 잡혀나갔다. 모두가 날 위해 돕는건가? 아니다, 그것 역시 내 착각이다. 사실 내가 하는 프로젝트는 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범위였고, 당연히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해야하는 일이었다. 모두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고, 이루고자 하는 뜻과 방향이 일치했으니 함께 모여 공동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작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일개 대학원생일 뿐이었다. 거기서 내게 기대되는 역할은 그저 매 주 한 주치 만큼의 진전을 보이고, 나의 시각을 보태고, 나의 생각을 제시하고, 회의에서 결정된 일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니 내가 수행해야할 역할은 생각보다 작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한 다음 내 역량 밖의 일은 교수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한계에 부닥칠 때 내게 도움을 주는게 교수의 역할이고 방향을 제시해주고 나를 키워주는것 역시 교수의 역할이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흐름이 어느정도 형성되고나니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혼자서 오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내 욕심만큼 크지 않았는데, 내게 기대되는 역할도 그만큼 크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혼자서 다 책임지려 하고 다 알아서 해야한다 착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연구를 하고 일을 해도 불안이 없다. 당장 바쁜 일이 없어 ‘느긋하게’ 하는 탓도 있겠지만, 한국 가기 전엔 금새 불안해지고 지치곤 하던 일들 - 논문읽기, 생각하기, 글로 정리하기, 회의 준비 등등 - 을 하더라도 힘든게 없으니 훨씬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그럼 내가 갖고 있던 그 무거운 책임감은 무엇이었을까?
먼 길을 갈 때에는 한 걸음 한 걸음만 내 딛으면 되는 것인데, 생각속에서 천리 길을 먼저 떠올리며 그 부담감에 제 풀에 지쳐버렸던 것 아닐까?
모든 무게를 다 지고서 ‘해야한다’고 하는 무거움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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